보드랍던 햇살이 돌변하는 것은 채 열 시가 못되어서. 숱 없는 머리 말라붙게 하는 독한 햇볕에 허겁지겁 밀짚모자를 챙겨 쓰고, 어미닭 보는 병아리처럼 옹기종기 모여선 모종판에 물을 뿌린다. 마른 흙이 쑤욱 빨아들이는 모습에 안도하며 마당을 순례하는 호스맨.
한낮의 뜨거운 햇살은 기어코 작약의 분홍 옷고름을 풀게 했다. '서면 작약, 앉으면 모란, 걸으면 백합'이라더니 커다란 꽃송이가 미인에 견줄만하다. 아름답기로야 항우가 사랑했던 우미인초, 개양귀비도 못지않다. 반전의 꽃, 개양귀비가 피기 전 모습은 '박씨부인전'을 연상시킨다. 도꼬마리처럼 울퉁불퉁하고 굽은 꽃망울이 곧추서더니 현란한 빛깔의 붉은 꽃으로 환골탈태하니 이처럼 드라마틱한 변신이 따로 없다. 수레국화도 꽃잎 하나하나 앙증맞고 예쁘지만 그 옆에서 시선을 모두 빼앗아간다. 그러니 너무 예쁘면 민폐다.
반면 사라져 가는 것들에겐 애틋함이 깃들어있다. 할미꽃은 흰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누렇게 바랜 이베리스와 서로를 위로하는 듯하고, 노랗던 황매화는 몇 안 남은 꽃이 하얗게 쇠었다. 드문드문 뜯긴 창호지 같은 흰 철쭉도 하얘서 더욱 애잔하고, 꽃잔디와 백리향은 어느덧 띄엄띄엄 스러졌다. 일그러진 장미매발톱은 끝을 아는 듯 안간힘을 쓰고 있어서 애처롭다.
꽃은 졌지만 열매로 부활을 꿈꾸는 것들도 있다. 매실은 이파리와 구분하기 어려운 녹색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고, 블루베리는 종꽃이 떨어진 자리에 푸른 구슬이 맺혔다. 작지만 제법 빠알간 딸기가 짙은 이파리 아래서 동그라니 열린 채 흙바닥에 뒹군다. 보리수는 꽃도 숨어 피더니 어디서 뭘 하는지?
텃밭에선 열무가 세 번째 싹을 틔웠다. 이처럼 충실한 채소가 또 있을까? 브로콜리 우산 밑에서 자라는 고수, 플랜터를 가득 채운 상추와 쌈채소에 입맛이 돈다. 양배추, 당근, 오이, 애호박, 완두, 고추, 방울토마토. 모두 이름을 불러주어야 관심을 받음에 더 잘 자람을 아는지? 감자꽃이 하얗게 피었다. 꽃이나 덩이줄기나 소박한 모습은 어쩜 그리 닮았는지. 사흘 전에 심은 고구마순이 이제 허리를 세웠다. 잘 뿌리를 내렸다는 소식.
한낮은 열두 시부터 네시까지. 점심을 마치고선 이불과 베개를 널어두고 단풍나무 그늘 아래서 장미꽃을 감상한다. 흰 장미, 빨간 장미. 운명적으로 가장 아름답다는 황금비를 가진 피보나치수열의 꽃. 패션모델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고 홀쭉한 체형의 버들마편초는 또 어떤가. 한국인이 원하는 달랑 작은 얼굴의 자줏빛 꽃이 피어난다.
해가 힘이 살짝 빠지는 시간, 전가의 보도인 예초기를 들고 나선다. 풀을 칠 때는 꽃을 떠올리면 안 된다. 광대나물, 가막사리, 갈퀴나물, 개불알풀, 벼룩나물, 진득찰, 질경이, 별꽃아재비, 주름잎, 괭이밥. 오늘 내 칼에 잘려나간 너희들. 안다, 너희도 나름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래서 망설이다가 뒤뜰 잔디는 누더기가 돼버렸잖니.
서서히 저녁이 어둠을 묻혀 이슥해져 간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멀리서 꿀렁이는 개구리울음은 호수와 맞닿아 있다. 잊을 만큼 일정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그 가운데를 똑똑 끊는 검은등뻐꾸기의 네 음계 울음소리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잔디 위 노랗게 가라앉은 조명과 밝지만 멀어서 희미한 가로등. 서서히 서늘해지는 밤공기 사이로 흩어지는 Luigi Tenco의 묵직한 음성, Mi Sono Innamorato Di Te(I fell in love with you). 아, 기분 좋은 나른함. 온몸이 저린 안온함이다. 턱을 괴고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로 향하는지 어둠이 넓어 확실치 않다.
격자울타리 사이로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의 빨간 미등이 보이고, 어둠이 만든 나무의 윤곽은 대낮의 그것보다 훌쩍 자라 있다. 허허, 이 늦은 저녁에도 패랭이는 옅은 불빛 아래 무더기로 피어 하얀 분홍빛을 발산하고 있네. 송엽국은 입을 앙다문 채 내일을 기약하고... 이렇게 일찍 여름으로 가는가? 너무도 짧은 봄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