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상추 먹는 날

Early in the morning, Cliff Richard

by 잼스

오, 귀여운 녀석들... 이제 모두 긴장해야 할 거다. 그동안 내가 호스맨으로만 보였지? 말 안 해도 목마를 때마다 나타나 물주는 충실한 집사. 미안, 오해야. 사실은 오늘을 위해 그동안 날카로운 발톱을 감춰왔거든? 난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쭈욱 봐왔단다. 이만큼 자란 것은 오로지 너희를 키워서 먹겠다는 내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야.


손바닥 크기로 자란 잎은 톡톡 분질러내고, 너무 빽빽하게 붙어 자란 녀석들은 한 놈이 양보해야지? 뿌리째 뽑아 밑동을 가위로 싹둑 솎아낸다. 플랜터에서 자라는 채소 중에선 적상추, 청상추, 양상추, 치커리가 오늘의 사냥감이다. 곧 시금치가 걷힐 것이고, 브로콜리와 고수는 아직 멀었다. 참, 시금치 사이에 숨어있는 바질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이처럼 잔혹한 현실을 알게 해선 안된다.


2월 하순에 흙이 녹자마자 퇴비로 영양보충을 해주고, 3월 3일에 씨앗을 뿌렸으니 딱 두 달만이다. 봄추위에 얼어 죽을 새라 비닐을 덮어주고, 가뭄에 네 목마름이 내 앞에 있었는데 어느새 이만큼 자랐다. 양푼 가득 담긴 상추를 흐르는 물에 차곡차곡 씻어내는 손길이 발랄하다. 바쁜 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와 킁킁 거린다. 뭐, 상추를 솎아내듯 내가 듣기 좋은 부분만 귀에 담는다.


When it's early in the morning

이른 아침이면

Over by the window day is dawning

창문 너머로 동이 터오고

When I feel the air

아침 공기를 맞으면

I feel that life is very good to me, you know

사는 게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쌈장에 참기름 한 스푼과 통깨를 갈아 넣고 참치캔을 딴다. 다른 반찬이 무슨 필요 있으랴. 오늘의 주인공은 쌈채소인걸. 큼직한 상추 위에 작은 것들을 켜켜이 쌓는다. 이런 플렉스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참치살은 조금만 얹는다. 퍽퍽해져서 쌈채소의 맛을 놓칠 수 있다. 있는 대로 크게 벌린 입에 한껏 쑤셔 넣는다. 우걱우걱 몇 번, 금세 사라진다.


'암소 한 마리'가 아니라 '상추 한 포기'가 통째로 올라있다. 한우, 육우에 수입산까지... 치커리는 뭐랄까 특수부위? 쌈에 고기가 없으니 별소리를 다한다 싶지만, 갓 수확한 쌈채소 자체만으로도 풍성하다는 얘기. 상추 하나로도 자연의 에너지가 밥상 위에서 산뜻하고 다채롭다.


뿌리째 뽑아 온 것은 큰 잎을 떼어내고 통째로 쌈장에 찍어 먹는다. 탱글탱글 탄력 있는 상추 속이 입안을 즐겁게 한다. 적상추는 아직 얇고 야들야들하다. 반면 청상추와 양상추는 어린것들이라 연하긴 해도 벌써 힘이 들어가 있다. 치커리의 쌉싸름함이 뒷맛을 정리해 준다.


나에게 있어 상추는 적상추다. 청상추의 뻣뻣한 근력, 양상추의 미끈한 탄력도 좋지만 적상추의 곱창처럼 꼬불꼬불한 식감을 따라올 수 없다. 색깔은 또 얼마나 현란한지 꽃으로 불리며 식욕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대체할 한 가지! 바로 상추 속이다. 꼬불꼬불하고 야들야들한 신선미(맛과 모양 모두)는 통째로 쌈장에 찍어먹을 때 그 맛이 배가된다. 입 안에서 터지는 아삭함과 깨끗하고 고소한 맛.


아는 맛이라고? 키워 먹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맛이다. 텃밭에서 비틀어 딴 후 10분 내로 먹을 수 있는가? 펄떡이며 바다에서 올라온 물고기를 배 위에서 회쳐 먹는 느낌이라 할까? 그런 말이 있다. "안 먹어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 말이야~". 사실 뭐가 다른지 알만큼의 미각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기분 좋다.


이제 한 상 잘 얻어먹었으니 보답도 할 겸 일하러 나가야겠다. 내일은 비소식이 있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푸르른 잔디밭 맑은 하늘에 시퍼러니 여름이 짙어오것다'. 시인이야 뭐라든 내 맘대로 각색해서 읊조리며 밀짚모자 눌러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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