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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Aug 06. 2023

말러를 듣는 밤

G. Mahler, Symphony No.5 4th Adagietto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듣습니다. 폭염의 여진, 열대야에 시달리는 도시와 달리 시골의 밤은 제법 선선합니다. 잔잔한 선율과 식어진 새벽공기가 살갗을 스치는, 이 시간은 축복입니다.  Adagietto라 쓰였지만 Sehr langsam(매우 느리게)으로 연주하라고 한 이 음악은 아주 조금씩 어둠을 밀어내며 흐릅니다.



20여 년 전 부천에서 근무할 때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 포스터에서 Mahler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습니다.  ‘시립교향악단이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클래식을 연주해야 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했었죠.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은 길고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나의 교향곡에 우리가 경험하는 온 세계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작곡가와 나란히 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시 부천필의 임헌정 지휘자는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무대에 올렸고 이후 집요한 도전으로 국내에 ‘말러 신드롬’을 일으킵니다. 덕분에 ‘말러는 어렵다’라는 세간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나에겐 여전히 멀게 만 느껴지는 그의 음악이지만 그래도 ‘Adagio(느린 속도로 연주) 보다 덜 느리게’라는 뜻의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만큼은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현악기와 하프의 아름다운 선율이 감미롭습니다.      


이 작품은 Mahler가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랍니다. 악보 필사와 음악 작업을 돕던 스무 살 연하의 그녀도 말러가 보내온 악보를 보고 ‘당장 나에게 오라’ 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죠. 로맨틱한 음악 프러포즈에 응해서 결혼까지 했지만 그녀의 작곡 활동을 반대하는 Mahler와의 갈등과 산후 우울증 속에 바우하우스 창시자인 그로피우스나 화가인 오스카 코코슈카와 염문을 뿌리는데 그가 그린 ‘바람의 신부’ 속 여인이 바로 Alma입니다.      


Mahler는 1902년에 교향곡 5번을 완성했지만 1910년 감염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 곡을 수정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아다지에토>는 프러포즈하던 당시의 그 곡과는 다른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연남이었던 코코슈카의 그림과 Alma를 향한 그의 기이한 행적을 보면 어떤 의미로든 곡의 뉘앙스를 고치고 싶지 않았을까요?   

      

사랑을 고백하는 <아다지에토>에서조차 감미로운 선율 너머 처연한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산 이의 어쩔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닌가 싶어요. 죽음에 대한 고찰은 그가 평생 천착했던 화두라죠? 그리고 그것은 교향곡 2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하네요. '말러는 늘 죽음을 생각하고 얘기하는 사람이었다'라고 한 Alma의 말처럼 사랑의 세레나데와 같은 Adagietto에서도 사라지고 잊히는 것에 대한 애상이 묻어납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 많은 영화와 CF에서 이 음악을 사용한 때문에 의도치 않게 물안개 자욱한 호숫가,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가 연상되는 간섭현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요. 현악기 선율의 긴장감이 치솟을 때 느끼게 되는 숨 막힐 듯한 아련함 때문에 많은 영화인들의 상상력이 발동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역시 음악은 정수리 한 뼘 정도 위에서 어떤 이미지로 구현될 때 생명력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질 수 없거나 이룰 수 없는 것일 때 더욱 강렬하지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도 이 곡이 쓰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다지에토>가 감독의 귀에 ‘애정이 꽃피던 시절’이 아니라 ‘헤어질 결심’으로 들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불륜과 심신을 지치게 하던 병마 속에서 억지로 버티며 고민하는 말러를 떠올려봅니다. 죽음이 멀지 않았던 그에게 있어선 어쨌든 결심만으로도 성공하게 될 헤어짐이었겠지만 말이죠.


식을 줄 모르는 폭염이 예고된 오늘, 어차피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요즘이니 영화라도 보아야겠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아다지에토>가 흘러나오는지, 음악만으로 상상되는 나의 scene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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