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스 Aug 22. 2023

콩국수 어때?

Always remember us this way, Lady Gaga

훤히 날이 밝았다. 창 밖 연둣빛 잔디가 찬란하다. 날 위해 밤새도록 똑같은 곡을 읊조리듯 불러준 Lady Gaga. 이젠 쉬게 해 주자. 인터넷서점의 <크레마클럽>, 서재의 문을 닫으며 중얼거린다. 아침엔 콩국수 어때? 책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운 나를 대접하려 한다.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김태웅, 김대호 著),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著),『질문하는 미술관』(이만열, 고산 著), 『말의 내공』(신도현, 윤나루 著), 『테드, 미래를 보는 눈』(박용삼 著). 잠을 뺏아간 책들이다. 공감은 잠을 이룰 수 없게 한다.


마트에서 사 온 콩국물이 냉장고에 있다. 문득 떠올랐다. "아차, 유통기한!". 헐... 오늘까지다. 혼자 끼니를 챙기다 보니 식사메뉴가 날짜의 영향을 받는다.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꿰고 있지 못해 퇴비장으로 직행하는 낭패가 아주 가끔 있다. 버려지는 음식만 상한 게 아니다. 내 속도 문드러진다. 


끓는 물에 국수를 삶는다. 소면 가락이 들러붙지 않도록 슬슬 저어주다가 거품이 끓어오르면 찬물을 부어 가라앉히길 두 번. 물이 세 번째 끓어오르면 면이 다 익었다는 신호다. 찬물에 헹구고 박박 문질러 전분을 뺀 국수에 얼음 대여섯 조각을 얹어 탱글탱글함을 유지시킨다. 


텃밭에서 가져온 오이와 아삭이고추를 채 썰어 고명을 만든다. 돌돌 말아 바라기에 앉힌 면 위에 고명을 얹은 다음 참깨를 잔뜩 갈아 넣는다. 이제 걸쭉한 콩국물을 면이 잠기도록 가장자리에 부으면 콩국수 모양이 갖춰진다. 김치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소금으로 짭짤하게 간 하면 된다. 마침 오이소박이가 있어 곁들인다.


묵직한 콩국물이 국수에 착 감겨 입안을 가득 적신다. 몇 번 씹지도 않아 주르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려 한다. 채 썬 고명이 고소한 맛을 놓치지 않도록 그 앞을 막아선다. 참깨를 넉넉히 넣길 잘했다. 예전 같으면 맛집을 검색하거나 주변에 물어 사 먹던 음식을 이젠 스스로 해결한다.  



맛도 모양도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쓸 필요 없다. 견주지 않는 삶은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 평가는 물론 칭찬도 반드시 외부에서 와야 할 필요는 없는 거다. 스스로 뿌듯한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만한 격려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정성을 다했는가 그래서 만족스러운가에 있다.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신경 쓰기보다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냥 나이 들어가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생활태도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나에게 있어 과거의 어떤 일들도 지금에 잔디를 깎거나 설거지를 하는 일보다 더 낫거나 훌륭하지 않다. 


한때 같이 근무했던 직장동료의 부음을 받았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큰딸로부터. 올해 은퇴했으니 연배로 치면 나보다 세 살 젊고 평소 지병을 앓던 것도 아니었다. 죽음은 너무도 가까이 있고 평범한 얼굴로 다가온다. 그러니 기억해야 할 것은 먼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비교가 아니라 고요다.

 

 And the whole world fades

I'll always remember us this way     

그리고 온 세상이 희미해질 때에,

우리 모습 이대로 기억할게




새들도 피서한 폭염의 한가운데엔 매미소리만 마당 가득 요란하다. 세끼 식사 준비, 꽃 가꾸기, 잔디와 나무를 건사하고 텃밭에서의 노동으로 하루가 간다. 그나마 끼니 외엔 내킬 때 하는 식이다. 사실 나는 놀고 있다. 아직도 조급함이 생활 곳곳에 드러나지만 느긋하게 잘 놀며, 놀듯이 일하려 한다. 


이처럼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생활은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정신적인 피로가 사그라진다. 반면 도시의 ‘보통의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로부턴 확연히 멀어진 느낌이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동료들과 기울이는 술 한잔,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골프나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 등등. 도시의 그들이 나를 염려하는 이유다.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이들은 심심한 것을 못 견뎌한다. 하긴 이곳에서 가장 자극적인 것은 TV시청 정도니까. 가끔씩 혼술도 하고 책 읽고 음악감상 하는 것으로 시간을 채운다. 아, 그리고 끊임없이 집을 보수한다. 모두 혼자 있는 연습이다. 고독이 친숙한 어른이 되기 위한. 


별것 들어가는 재료 없이 투박하지만 간간한 콩국수처럼, 심심하지만 소금 간만으로도 감칠맛이 도는 콩국수처럼, 만들기 쉬운 간편식이지만 더위에 지친 심신을 북돋아주는 시원하고 영양가 높은 콩국수처럼 여기 있는 내 삶도 특별하지 않아 좋은 날들이 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짜 뉴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