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정원생활의 꽃은 꽃입니다. 화려한 색의 향연이 펼쳐진 꽃밭을 보면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공적인 꽃가루받이를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식물의 생식기'라며 <신비한 식물의 세계>에서 이성규 박사는 내 눈에 콩깍지를 벗기려 했지만 소용없습니다.
처서가 지나니 날씨가 조금은 순해진 느낌이 드네요. 봄가뭄부터 잔혹한 여름의 폭우, 장마, 폭염과 태풍을 이겨낸 꽃들이 마당 곳곳에서 살아남았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내 마음도 애틋하고 꽃들이 대견합니다. 사진과 함께 시계방향으로 만나볼까요?
잔디마당 한가운데 선 배롱나무에 폭죽 같은 꽃이 피었습니다. 백일홍이라 불리지만 사실 이 꽃은 하루 만에 집니다. 하지만 새로운 꽃이 계속 피어나 오랜 기간 꽃이 피는 것처럼 보여 목백일홍이 되었습니다. 줄기를 간지럽히면 간지럼을 타듯 흔들린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동요 속 누나가 그렇게 좋아라 했던 과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죠. 가을꽃이라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7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서 벌써 시든 것도 있으니까요. 남편 잃은 과부 '추금'을 지켜준 꽃이라서 과꽃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네요. 사진 속 '바늘 과꽃'은 그 변종입니다.
흰 것은 어리연꽃, 노란 것은 노랑어리연꽃이라 불립니다. 앙증맞은 모습 때문에 애기연꽃이라고도 하죠. 올봄에 네 촉을 심었는데 잎이 큰 화분을 가득 채웠습니다. 6월 중순에 첫 꽃망울을 틔우더니 이렇게 꾸준히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부성애를 자극하네요.
버베나(Verbena)는 흰색, 분홍, 빨강, 자주, 보라 등 다양한 색으로 꽃밭을 장식합니다. 올망졸망 피어난 꽃 자체도 귀엽지만 개화기간도 길어서 가을까지 꾸준하기 때문에 많은 가드너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꽃 피는 모양이 넓적한 말채찍을 닮았다고 해서 숙근버베나(버들마편초)와 같은 마편초(馬鞭草) 과로 분류됩니다.
장미 하면 빨간 꽃잎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같은 장미라도 다양한 색깔을 띠는 것은 꽃마다 색소 물질의 종류와 함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빨강, 파랑, 녹색의 파장을 동시에 반사할 수 있는 물질을 지닌 이 장미는 우리에게 흰색을 보여줍니다.
부레처럼 잎자루가 부풀어 수면에 뜨는데 그 꽃은 옥잠(玉簪), 즉 옥비녀를 닮아 부레옥잠이라고 합니다.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지 이른 봄추위에 잎자루가 얼어 잘라냈는데도 살아났어요. 너무나 왕성한 번식력 때문에 수면 밑의 생물이 빛과 산소부족으로 죽어가자 외국에선 생태계 교란식물로 지정했다네요.
플록스는 눈길을 확 잡아 끌만큼 탐스럽고 예쁜 꽃을 피웁니다. 사진 속 플록스는 노지월동이 되는 숙근 플록스입니다. 숙근(宿根; 묵은 뿌리)은 겨울에도 뿌리가 살아남아 종자 없이도 매해 생장을 다시 하는 초화류를 말합니다. 올여름, 나는 괴팍한 날씨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숙근 식물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향이 좋아 요리에 얹어 먹으려 심은 바질에 깨꽃처럼 조그만 꽃이 피었어요. 고수처럼 향신료로 사용되는 허브로, 그 이름은 ‘왕’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바실레우스(βασιλευς)에서 온 것이라고 하네요. 반질거리는 이파리가 먹음직스럽지만 꽃이 피면 이미 달콤한 향도 부드러운 식감도 없어진 상태랍니다.
보리와 비슷한 수염 뿌리를 가진 것이 겨울에도 살아 있어 맥문동(麥門冬)이라 불립니다. 얼핏 라벤더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꽃이 드문데 맥문동은 그런 고민을 덜어주죠. 덩이뿌리는 한약재로 쓰이기도 하고 차로 음용하기도 합니다.
삼엽국화는 츤데레 같은 꽃이죠. 제 스스로 화려함을 뽐내지 않고 화단의 배경이 되어줍니다. 여러해살이로 정원이 허전하지 않도록 작약과 철쭉 등 봄꽃이 지고 나면 꽃밭을 노랗게 물들입니다. 그리곤 잡초 속에서, 키 작은 꽃 뒤에서 가을까지 서있습니다.
수국은 월동 때문에 꽃 피우기 까다로운 식물이지만 라임수국만큼은 그런 걱정을 덜어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꽃을 키워보니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어요. 그러니 손이 덜 가고 제 몸 스스로 건사하는 꽃들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게 됩니다.
독말풀은 맹독성 식물이지만 나팔 모양의 희고 커다란 꽃이 눈에 확 띄어 정원 디자인에 포인트 역할을 합니다. 한해살이지만 씨앗을 떨궈 해마다 자연발아 합니다. 씨앗과 잎에 독소가 있어 진통제, 마취제, 최면제로 쓰이기도 한다네요.
벌들이 꽃범의 꼬리 꽃 속에 얼굴을 틀어박고 정신없이 꿀을 빨고 있습니다. 꽃송이를 잘 보면 호랑이 입처럼 생겼는데 벌들이 들락날락하는 걸 보면 참 재밌습니다. 꽃차례가 범꼬리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워낙 번식력이 좋아 일부 가드너들에겐 경계대상으로 꼽힙니다.
희고 붉은 가우라(Gaura)는 야리야리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생명력이 강합니다. 꽃도 귀여워서 나비바늘꽃이라 불리는데 하늘하늘한 잎과 튀어나온 수술이 나비가 나는 모습을 연상케 하네요.
메리골드는 원산지에 따라 아프리칸 메리골드(천수국)와 프렌치 메리골드(만수국)로 나뉩니다. 위 사진은 동그랗고 노란 꽃송이가 탐스런 천수국이고 이에 비해 만수국은 키가 작고 붉은 벨벳 느낌의 화려한 꽃이 핍니다. 한해살이지만 한번 자리 잡으면 해마다 영역을 넓혀가는 생명력이 강한 식물입니다.
잎이 나기 전 땅 위로 삐죽 나온 줄기에 꽃부터 시전 하는 꽃이죠. 그래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빗댄 슬픈 이름을 갖게 되었다죠? 꽃밭에 핀 붉노랑상사화(相思花)는 멸종위기종은 아닙니다만 긴 장마에 구근이 썩었는지 딱 하나의 자루만 올라왔네요.
상사화 뒤편으로 솔잎 모양의 채소라는 이름을 가진 채송화(菜松花)가 만발했습니다. 일 년생이지만 자연발아를 통해 번식하는 다육식물입니다. 튤립이 지고 허전한 자리에 씨앗을 그냥 툭툭 던져두었는데 무리 지어 예쁘게 피었네요.
백일홍(백일초)은 다양하고 진한 꽃색깔과 또렷한 꽃모양이 일품인데 비해 줄기는 볼품이 없습니다. 상한 듯 벌레 먹은 듯 지저분하기도 하고 쉽게 꺾여 쓰러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밀식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면 잘 쓰러지지 않고 흉한 이파리도 꽃에 가려집니다.
소개한 여름꽃들은 대부분 씨앗을 뿌리면 발아가 잘 되고, 어떤 형태로든 노지에서 월동을 하면서, 키우기 쉬운 꽃들입니다. 올 한 해 꽃들과의 교감은, 사계절 꽃 피고 쉽게 관리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어 가는 꽃놀이입니다. 이슬 맺히는 백로가 되면 가을 파종을 하고 이 정원에 어울리는 꽃 탐구생활을 이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