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뽑는다

작은 기다림, 쿨

by 잼스

바야흐로 그 시기다. 어떤 이는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수양이라고 한다. 전원생활을 극구 말리는 고된 노동이기도 하지만 무아無我와 삼매三昧의 경지에 쉽게 이르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전자에게는 잡초, 후자에게는 무명초라 불리는 풀을 뽑는다.


유례없이 긴 장마와 폭염으로 바깥 활동이 줄어들었다. 비와 태양을 핑계 삼아 게으름이 늘어졌다는 얘기다. 잡초 무성한 정원을 바라보며 그걸 변명이라고 늘어놓는다. 그러는 사이 축축한 흙과 뙤약볕 아래, 풀은 그야말로 폭풍성장의 조건을 만났다.


뒤뜰엔 풀들이 종아리에 닿을 만큼 우거지고 화단의 꽃들은 들풀에 가려져진 채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벽돌 틈을 따라 갖가지 풀들이 튀어나오고 심지어 갈라진 시멘트 틈새에서도 잘 자란다. 놀랍도록 강인한 생명력이다. 하지만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생각이 다르다. '잡초는 연약하다'.


잡초는 연약해서 경쟁에 뛰어든다 해도 강한 식물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잡초는 강한 식물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만 골라서 자라난다. 그런 데가 바로 길가나 밭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특수한 장소다. 숲 속에서 잡초가 자라는 걸 보았다는 이들도 있을 텐데, 아마 하이킹 코스나 캠핑장처럼 인간이 관리하는 곳일 것이다.


그의 저서 <전략가, 잡초>에 따르면 잡초는 연약하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살아남는 전략'을 쓴다고 한다. 강한 식물이 자라지 않는 곳만 골라서 자리 잡는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정원은 '쉬운 곳'이다. 어쩌다가 잡초에게 드잡이를 당하는 처지가 됐는지.



식물은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잎을 활짝 펼치고 다른 식물을 가리며 위로 올라간다. 땅 밑에선 뿌리를 뻗쳐 물과 영양분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다툰다. 숲 속에서는 연약할지 모르지만, 사람 손을 탄 곳에선 잡초의 이 같은 본능이 강하게 발현된다. 열악한 환경을 견뎌온 DNA와 탁월한 번식력을 바탕으로 떼 지어 다른 식물들의 생장을 막아선다. 심지어 자신을 방어하고 주변 생물을 공격하는 화학물질(타감물질他感物質)까지 분비해 가면서.


이 경쟁에서 지는 쪽은 늘 사람의 눈에 보기 좋아 간택된 식물이다. 개중엔 노심초사해야 고작 한 두 개나 살아 꽃 피울 둥 말 둥 할 만큼 번식력도 뒤처진다. 아무리 흙을 골라 씨 뿌리고 퇴비와 물을 주어 정성을 다한다 한들 정원의 꽃들은 작은 키에 가는 줄기, 깊지 않은 뿌리를 가졌으니 잡초들에게 얕잡히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관리인은 집안에 틀어박혀 나와보지도 않으니 서서히 정원의 판도가 바뀔 수밖에.


꽃밭이 풀밭이 된 사연을 알게 됐으니 호미를 쥔 손에 힘이 간다. 정원을 살리자. 비장한 각오로 화단 한쪽부터 공략한다. 잡초 뿌리에 엉킨 흙에 아끼던 식물 뿌리가 같이 끌려 나온다. 뽑을 풀에만 열중하다가 멀쩡한 꽃대를 밟는다. 따가운 나무가시에 찔려 소스라치게 놀란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고기 냄새에 흥분한 모기들이 앵앵거린다. 땅벌에 말벌에 쏘일지 몰라 조심하지만 날벌레는 연신 눈동자 속으로 날아든다. 아래만 보고 열심히 전진하다가 끈적한 거미줄에 얼굴이 척하니 걸린다.


가장 제거하기 힘든 것은 쑥과 강피다. 쑥은 경이로울 정도로 뿌리가 깊고 널리 퍼져있다. 오죽하면 원자폭탄을 맞고도 제일 먼저 살아났을까? 여간해선 색원 할 수 없다. 강피는 악착같이 흙을 움켜쥐고 있어 힘주어 당기면 제 몸을 뚝뚝 끊어내기 때문에 좀체 발본하기 힘들다. 바랭이도 만만치 않지만 올해는 유난히 밭둑외풀이 많이 보인다. 움켜쥔 손아귀를 쳐들면 후드득 뽑혀 올라오는 풀뿌리, 송두리째 잡아 올렸을 때 내 안의 가학성이 희열로 꿈틀거린다. 수양은 무슨. 손수레 가득 세 번을 날랐지만 아직 빽빽한 곳이 남아있다.


방동사니, 명아주, 강아지풀, 괭이밥, 까마중, 미국자리공, 지칭개, 질경이 등 내가 이름을 불러주어도 다가와 꽃이 될 수 없는 풀들이 지천이다. 그래도 닭의장풀, 개여뀌, 고마리, 씀바귀, 개불알풀, 광대나물 등은 꽃이 제법 귀엽다. '농촌진흥청 지정 100대 잡초'에는 달맞이꽃, (개)망초, 메꽃, 부들, 억새도 포함되어 있다. 정원에 들이고 싶을 만큼 예쁘지만 워낙 번식력이 강해서 다른 식물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잡초 명단에 기구한 이름의 망초亡草와 개망초가 눈에 띈다. 둘 다 북미 원산의 외래종이다. 경술국치(1910) 즈음에 전국에 널리 퍼졌는데 농사에 방해가 될뿐더러 나라가 망할 때 돋아난 풀이라 하여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개망초는 다른 속(Genus)이지만 망초와 무척 닮았고 '개'는 흔하다는 뜻 외에 참, 거짓에서 가짜라는 뜻도 갖고 있어 '개'라는 어감에 더해 망국의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뒤뜰은 잡초에 점령당했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풀밭을 향해 예초기에 시동을 건다. 요란한 소음, 기름 타는 냄새에 잡초들이 숨 죽인다. 어깨와 팔에 와닿는 기계의 떨림은 잠시 후 잡초의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튄다. 내 온몸에도 선혈이 낭자하다.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사실 이 싸움은 승산이 없다. 열흘 정도면 다시 타임 리프, 내일은 어제가 된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방법은 있다. 고택이나 산사의 마당처럼 열심히 비질을 해서 풀씨가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검정비닐이나 부직포를 덮어 햇빛을 차단하는 방법도 있다. 단점이 치명적이다. 잡초를 만나지 않는 대신 다른 식물도 자랄 수 없다. 백리향, 꽃잔디 등 지피식물을 심어 잡초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땡볕에 한 이틀 열심히 풀을 뽑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왜 풀을 뽑는가? 왜 비가 오고 난 후면 풀 뽑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가? 불필요하고 존재가치가 없는 것은 없애야 하는 것인가?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방어본능인가? 아니면 무질서에 대한 반감 또는 두려움일까? 대답은 대체로 Yes인 것 같다.


사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은 우리가 '원하는 자연'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자연스러운 자연'이 아니라 '인위적인 자연'이다. 적어도 내 뜰안에서는 그렇다. 벌레 하나만을 예로 들어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인다지만 정원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나의 선택적인 꾸밈이 깃든다. 인간의 선호에 따라 자연의 질서를 비트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원은 자연을 소재로 한 창작에 가깝다. 모네가 정원과 캔버스의 그림을 작품으로서 동일시한 것처럼.


완전히 방치하면 마당이 어떻게 쑥대밭으로 변하는지 나는 이미 첫 번째 시골집 마당에서 경험한 바 있다. 원하지 않는 모습의 식물이 바라지 않는 곳에 자라는 것을 방치할 경우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잡초는 내가 원하는 식물의 성장은 물론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거북하고 공존하기 어렵다. 단지 작물로서의 가치를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적대시하거나 척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선에서 타협하자.


잡초를 솎아낸 자리가 휑하다. 그들의 역할과 존재가치까지 같이 들어낸 것은 아닌가 미안한 마음도 든다. 폭우와 가뭄에 흙이 쓸려 나가는 것을 잡아주었는데, 더 살아서 나름 미생물의 서식처, 밀원 식물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진 않았을까? 피죽 먹던 시절을 까맣게 잊고 건강식품과 약재, 별미음식의 재료로 쓰일 수 있음에도 무지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좀 더 공부해 '개정원생활자'가 아닌 '참정원생활자'로 거듭나는 날에는 정원 곳곳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널 이렇게 보내줄 수밖에 없었어

나 후회할지도 모른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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