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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회의 이름 붙이기 논쟁

- 이태원에서 허망하게 시들어 버린 청춘들

by 콜랑

말도 안되는, 상상하기도 싫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친구도, 가족도, 제삼자도.

허무하게 떠나간 젊음에, 당혹감과 황당함이 사무치는 아픔으로 뼈 아프고 심장이 도려지고 있을 즈음.


언론에서는 '참사'와 '사고'를 두고 정부 책임론과 음모론 사이의 정치 공방을 다루느라 이러쿵 저러쿵......


'또들 이러고들 있구나!' 싶던 차에 오늘 현수막에서도 그런 편 가르기의 현장을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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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침 방송에서는 의도적인(음모론적인?) 이름 붙이기에 대한 국어학자의 고견(?)을 묻기도 한다.

캡처.PNG



흠...


한창 때의 젊은이들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고, 그러기 위해서 물어야 할 책임과 다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짚어야겠지.


그런데...

어째 이름 붙이기에 관한 작금의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말(언어)'이라는 게 이런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말인지라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게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냥 무시하면 무시할 수 있는 게 말이기도 하다.

둘째, 말이라는 게 본래가 본질이 아닌 게 본질이다. 상징 기호의 본질이다.


말에 천착하면 할수록 인식은 본질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다.

언론의 보도도 그렇고, 그런 보도 내용이 현실임을 보여주는 현수막도 그렇고, 그런 사회 현상을 비판하려고 시도하는 방송도 그렇고, 그런 담론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젊은이들만 불쌍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담론이 되풀이되면서 재생산되는 슬픈 사회의 이름 붙이기 논쟁을 보면 슬프기까지 하다.


"인도하는 사람들"이 "답변할" 책임을 가지고 우리를 "깨어 지키"도록, 인도할 사람들과 우리 스스로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는 사회가 되어야 허망하게 져버린 청춘들에게 덜 미안할 수 있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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