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짓기 - 차별과구별짓기의 무한루프

- 언어와 기호의 사회학

by 콜랑

언어는 본질적으로 기호의 한 종류이다. 지시, 지표, 도상 등이 다 기호이고 언어도 기호의 한 종류이다. 모든 기호는 퍼스가 말한 3차적 존재자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던 언어는 '주술적 기능'도 할 수 있다(https://brunch.co.kr/@korlang/31 참조).


<일반 언어학 강의>로 유명한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소쉬르. 그는 퍼스가 말한 3차적 존재자로서의 기호의 속성 때문에 '도대어 언어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언어 연구은 '차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달]'과 '[딸]'의 소리 차이는 '[ㄷ]'과 '[ㄸ]'인데 이 차이가 의미를 구별하는 유일한 단서이다. 이 차이가 '달(月, moon)'과 '딸(女(적당한 한자가 없으니 임시로), daughter)'의 의미를 붙들어 둔다. 어문계열 대학 졸업자들은 '달, 딸'을 최소 대립쌍이라는 개념의 예로 배웠을 거다. 이런 개념이 만들어진 연유가 바로 소쉬르가 언어학 연구를 '차이'를 기본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머리 속에 떠올리는 개념들은 모두 이런 기호의 차이로 명명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어휘는 이런 차이를 바탕으로 나름의 의미를 붙들어두고 있다.


이 차이는 무언가를 구별해 주는 인식론적 단서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어휘를 달리 사용한다면 무언가를 구별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구별하는 의도는 때로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예가 바로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과 관련된다. 그런 노력의 예는 아래 사이트를 보면 알 수 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8/2016122801160.html

https://blog.daum.net/docupd/5958273


이런 문제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구별짓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구별짓고 그런 구별은 점차사회적인 차별로 드러난다. 그러니 구별짓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기호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장애우'를 '장애인'으로 바꾸려는 노력에는 사회적 구별을 없애려는 노력이 담겨있지만, 그래서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언어학적으로는 어차피 구별짓기의 한 방식일 뿐이다. '장애우'건 '장애인'이건 '정상인과 대비되는 어떤 개념'을 붙들어 둔다. '우(friend, 友)'가 언제부터 비하나 차별의 뉘앙스를 가졌고 왜 '장애'와 관련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런 뉘앙스가 있다고 느껴지면 차별을 없애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현실 세계에서 사라져서 더 이상 그런 개념을 소환하는 주술식(이름짓기=용어)이 불필요해지지 않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장애를 가진 사람'을 소환하는 주술식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인식 세계에 소환해야 하기 때문에. '花(flower)'을 '[꽃]'이라고 불러 주어야만 꽃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언어학적으로는 꼴(모양)만 바뀔 뿐 계속 존재하게 된다.


말을 바꾸려는 노력은 분명 우리의 의식, 정신을 바꾸려는 노력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말을 바꾸려는 노력이 의미하는 의식을 바꾸려는 노력일 거다.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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