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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랑 Oct 20. 2015

병맛 - 불온한 맛

- 한국어와 한국 사회, 하나 

                                                                                       <사진: 김정운 교수의 창의력 강의 중에 사용된 사진> 


    음식이 존재하고 언어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맛에 관한 표현은 존재할 것이다. 물론 얼마나 많은 종류의 맛 표현이 있느냐 하는 것은 언어마다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맛과 관련된 표현들이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양상에도 언어마다 차이가 있다. 음식의 맛과 관련하여 최근에 등장한 몇 가지 표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선, 맛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 두 가지만 생각해 보고 최근에 등장한 표현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인간의 미각은 기본적으로 단맛, 쓴맛, 짠맛,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어에도 이 네 가지 맛을 표현하는 기초 어휘가 있다. '달다, 쓰다, 짜다, 시다'. 네 가지 기본적인 맛에 해당하는 어휘들이다. 아마도 이 정도의 맛 표현들은 어느 언어에나 있음직하다. 한국어만의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금 특이한 맛이라고 하면 이것 정도일까?

감칠맛

장금이나 낼 수 있다는 그 맛! 제5의 미각에 의해 느껴진다고도 하는 그 맛! 현대 과학이 조미료맛으로 재현해 낸 그 맛이다. 이 맛을 다른 언어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어나 일본어의 경우에는 '풍미가 깊은 맛' 정도를 뜻하는 어휘들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중국어의 경우 형용사 '可口(kěkǒu)' 정도에 해당할 법한데 우리와 정서적으로도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감칠맛' 정도는 조금 특이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결국에는 '맛있는 맛', '좋은 향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맛'에 관한 표현은 대부분의 언어에 존재할 것 같으므로 한국어만의 특징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기는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맛 관련 표현들은 언어 보편적으로 비유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물론 비유 방식에는 언어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정도는 세계의 어느 누구라도 직역할 수 있는 어휘만 있으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비유일 것 같다. 

요즘은 사는 게 꿀맛이야. (^^/)
요즘은 사는 게 죽을 맛이다. (ㅡㅜ)

우리의 삶을 맛에 비유하는 표현인데 외국어 직역하더라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맛과 관련된 한국어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공부를 열심히 안 한 탓에 관련 논문이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나중에 시간에 되면 찾아보기로 하고 최근에 생긴 몇몇 표현들을 보기로 하자.

엽떡맛, 마약맛, 골판지맛, 폭탄맛

최근 인터넷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맛들이다. 적어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 폴란드어에는 이런 맛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나타난 특이한 맛들이다. '맛'의 의미가 어떤 사고의 확장 과정을 거쳐서 이런 맛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연구 과제일 것 같은데, 아무튼 희한한 맛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엽떡맛'은 '엽기떡볶이맛'의 줄임말이다. 너무 매워서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매운 맛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마약맛'은 상업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맛 표현이다. '중독성이 있는 맛'을 말하는데 매운 음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매운 맛을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골판지맛'이라는 표현을 처음 봤을 때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서도 얼마나 역겨운 맛인지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한편으로는 정말 기똥찬 비유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폭탄맛'은 그냥 아주 매운맛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북핵 문제가 십 수년 동안 사회 문제가 되어 온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폭탄맛'을 '수류탄맛, 미사일맛, 핵폭탄맛' 등으로 세분하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 과거 매운 맛이 한국 사람들의 속을 풀어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맛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왜 하필 폭탄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 외에 아주 특이한 맛도 있다. 이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것도 실은 이 맛 때문이다.

병맛 


'병맛'은 기원적으로는 말 그대로 병신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쓰이던 말이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더럽게 맛없는 음식'의 맛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하고 있다. 뭐, 대충 '골판지맛'과 비슷한 정도의 뜻으로도 사용하는 모양인데 아마도 저학년들이 주로 이런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사회생활을 시작할 정도의 나이가 된 사람들에게는 '병맛'이 현 사회에 대한 자조(自嘲) 섞인 안주(安住) 태도를 나타내는 특이한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부족함 없이, 그리고 큰 실패 없이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맛인지도 모르겠다.


    언어마다 '맛'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된다. 한국어의 맛 관련 표현들은 '맛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하다.  그런데 21세기에 생겨난 한국어의 맛 표현들은 왠지 모르게 격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의미에서 다소 불온한(?) 듯해 보인다. 그 중에 으뜸으로 불온한 맛은 아마도 이 시대의 뼈아픈 사회상을 드러내는 '병맛'이 아닐까? 격이 떨어지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을 죄는 맛이다. 우리 사회를 감칠맛이 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모두의 가슴을 너무나 강하게 옥죄는 이 '병맛'은 정말로 불온한 맛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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