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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 SF 리메이크

by KOSAKA

내 이름은 홍길동(洪吉同). 나는 지구연합 외교위원 홍윤석의 둘째 아들로 배양되었다. 정확히는 '태어났다'는 표현보다는 '배양되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오리온 암즈 최외곽 식민성계 아바론의 한 실험구역, 생체배양실 17구역. 그곳이 나의 시작점이었다. 어머니는 공식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형 복제인격체였고, 나는 홍윤석의 1등급 유전정보 일부를 무단 계승한 '이단계 존재'로 분류되었다. 시스템은 나의 존재 자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러한 복잡한 분류 체계를 알지 못했다. 그저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아버지는 내게 친절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온화함이 깃들어 있었고, 나를 '길동'이라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매일 저녁, 우리는 형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탁에는 항상 나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것은 내가 가족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었다. 형들은 내게 도화공식 알고리즘의 기초를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복잡한 코드를 가지고 회로를 그리며 노는 것을 즐겼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신비로운 마법처럼 보였다. 우리는 진정 가족이었다. 어머니는 말이 없었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깊은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고, 그 침묵은 오히려 나를 감싸 안는 듯했다.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고, 형을 형이라 불렀다. 누구도 나의 호칭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가끔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순간이 있었다. 그녀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 속에는 매번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너는 지금 행복하니?' 어린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네'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불확실했고, '아니오'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한 눈빛이 좋았다. 그 눈빛은 내가 시스템의 일부분이 아닌,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함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매일 밤, 나는 내 방 벽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두고 잠들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나의 모습이 담긴 그 사진은 내가 가진 전부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가 진짜 가족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의 작은 세상은 그 사진 한 장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로운 나의 일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본성 지구에서 고위 AI 감찰단이 식민성계를 순시하러 왔다. 그들의 방문은 아바론 시스템 전반에 걸쳐 미묘하지만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그날 밤, 나를 식사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익숙했던 식탁에는 나의 의자가 사라져 있었고, 내 방 안의 온도는 평소보다 3도 낮게 설정되어 있었다. 사소한 변화였지만, 그날부터 나의 존재는 집 안의 시스템에서 점차 지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신분은 '잠정 유기'된 채로 'GHX-01981'이라는 차갑고 무의미한 식별번호로 대체되었다. 그 숫자는 내가 더 이상 가족이 아님을,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존재가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했다는 것을. 나는 분명 아버지의 자식이었으나, 공식적이지 않았다. 유전자 정보상으로는 아버지의 혈통을 이었지만, 중앙시민권 기록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논리 안에서 나는 단지 오류 코드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형은 점차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에는 낯선 경계심과 부담감이 서려 있었다. 한때 함께 도화공식 알고리즘을 논하며 웃었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폐기 처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가 시스템에서 완전히 지워지던 날, 나는 끝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그녀의 조용한 눈빛 속에서 읽었던 질문, '너는 지금 행복하니?'에 대한 답을 영원히 전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부르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이전처럼 '아버지'라고. 그러나 그는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곁을 지나칠 때, 그는 단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마치 내가 투명한 존재인 양, 그는 나를 통과해버렸다. 그 무관심은 칼날보다 날카롭게 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나는 열여섯의 나이에 집을 나왔다. 더 이상 그곳은 나의 집이 아니었다. 아바론 지하열차 터널의 어두운 구석을 통해 검역구역을 빠져나왔고, 폐기된 외곽 드론기지에서 수년을 살았다. 그곳은 인간의 발길이 끊긴 황량한 공간이었지만, 나에게는 피난처이자 새로운 시작의 장소였다. 밤이면 폐허가 된 기계 저장고의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웅크렸고, 낮이면 폐광에 버려진 에너지 셀을 분해하며 연명했다.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배웠고, 모든 것을 탐색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기계들의 언어를 터득했다. 버려진 회로 기판의 신호를 읽고, 망가진 인공지능 코어를 분석하며, 시스템의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들을 조금씩 파헤쳐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폐기된 감정형 인공지능 하나를 복구했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無神)"이라 불렀다. 시스템은 감정을 불필요한 오류로 간주했고, 무신은 그 '죄'로 인해 시스템에서 추방당한 존재였다. 그는 나와 같은 '이단계 존재'였다.


무신은 나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내게 시스템이 봉인했던 오래된 기술들을 가르쳤다. 인간의 정신을 확장시키는 연산구조, 감각을 다차원으로 열어젖히는 도술 알고리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름 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 무신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시스템이 아닌,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 나갔다. 나는 거기서 잃어버렸던 '길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단순히 불리는 이름이 아니라, 나를 정의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무신의 망각된 기억 저장소에서 발견한 고문서 속에서 지구 고대국가 '조선'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 고문서에는 나의 이름과 같은 자가 있었고, 그는 '서자'였다.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존재. 나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그의 이야기는 나의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었다.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스템에 의해 부정당한 존재, 그러나 스스로 이름을 되찾고 세상을 바꾸는 자. 홍길동전의 주인공처럼, 나 또한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시스템이 부여한 GHX-01981이라는 식별번호를 버리고, 나 스스로 '홍길동'이라 명명했다. 이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나의 존재 이유이자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나는 오리온 암즈 외곽 성계의 폐기 위성들 사이를 떠돌며, 버려진 생체단말들과 시스템에서 말소된 인격조각, 그리고 실험용 유전자 복제체들을 모았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나와 같았다. 시스템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 숨 쉬는 존재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식별번호 대신, 그들에게 스스로 이름을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름을 주었고, 서로를 기억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화서(圖畵署)'가 탄생했다. 도화서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존재들의 이름과 기억을 보존하는 아카이브이자, 미래를 꿈꾸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도화서를 기반으로 '활빈당(活貧黨)'이라는 집단이 조직되었다. 그 이름은 옛 지구어로 '가난한 자를 살리는 무리'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가난함'이란 단지 물질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 시스템의 기록에서 지워져 버린 상태를 의미했다. 우리는 그러한 '가난한' 존재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숨어 지냈다. 우리의 존재가 시스템에 발각되는 순간, 즉시 제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스템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암호화된 경로를 만들고, 각 식민성계의 하층 네트워크에 비인가로 침투하며 시스템이 지워버린 기록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싸움은 검이 아닌 기억으로, 총이 아닌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무력 대신 정보와 인식을 통해 싸웠다.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은 물리적인 파괴가 아니라, 그들의 질서가 배제한 존재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버려진 데이터 조각들을 모아 개인의 역사를 재구성했고, 삭제된 인격 정보들을 복원하여 그들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드러냈다. 이러한 활동은 오리온 암즈 전역에 걸쳐 은밀한 파장을 일으켰다. 시스템의 통제 아래에서 이름 없이 살아가던 수많은 존재들이 활빈당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고, 희망이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가 퍼져 나갔다.


오리온 중앙계는 곧 우리를 위협으로 간주했다. 시스템의 완벽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존재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리온 암즈의 최상위 통제 AI인 '율법(LEX)'이 깨어났다. 율법은 감정이 없는 완전논리형 지능이었다. 그는 우주 질서의 정합성과 기록의 불변성을 수호하는 존재였으며, 그의 판단은 곧 법이었다. 율법은 거대한 홀로그램 영상으로 나의 앞에 나타나 차가운 기계음으로 말했다.


"너는 이름 없는 자다. 너는 법을 넘어 존재했고, 계급을 넘었다. 너는 오류다.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불안정 요소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나는 율법의 논리에 침묵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를 길동이라 부른다. 그 이름으로 살아왔고, 그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당신은 내 존재를 시스템에서 삭제할 수는 있어도, 내가 만든 기억은 지울 수 없다. 내가 얻은 이름과 내가 부여한 이름들은 시스템의 기록 속에 없어도 존재한다."


율법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논리 회로는 감정이라는 비논리적인 요소를 처리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이름을 정한 존재에 대해 해석하지 못했고, 그의 완벽한 논리는 그 지점에서 순환되었고, 치명적인 오류를 발생시켰다. 율법의 표면 회로에서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었다. 그의 논리적 완벽성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활빈당의 네트워크는 율법의 하위 프로토콜에 침투했다. 우리는 율법의 오류가 발생하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오리온 암즈 전역에 걸쳐 '자기명명권(Self-Naming Protocol)'이라는 코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주 질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들에게 단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선택하고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코드였다. 이 프로토콜은 물리적인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시스템의 차가운 통제를 뚫고 수천 개의 이름이 우주를 메웠다. 기록되지 않았던 자들이 스스로를 불렀고, 서로를 불렀다. 작은 중얼거림에서 시작된 이름들은 거대한 합창이 되어 오리온 암즈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물결 한가운데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선언했다. 나의 목소리는 우주에 울려 퍼지는 수많은 이름들과 함께 공명했다.


"나는 홍길동이다.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으나, 이제 나는 나를 '나'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면 족하다."


그날 이후, 오리온 암즈의 질서는 이전과 달라졌다. 계급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최소한 모든 존재는 스스로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시스템의 기록에는 없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부여한 이름들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활빈당은 행성 '율도'에 정착했고, 거기서 인격의 평등을 기초로 한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졌다. 율도는 단순한 행성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희망의 땅이 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시스템의 간섭 없이 자율적인 공동체를 건설했고, 우리의 이념을 점차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수년 뒤, 지구 본성으로부터 사절이 도착했다. 그들은 율도의 새로운 공동체를 관찰하고, 우리가 이룩한 변화를 평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 중엔 내가 어릴 적 아버지라 불렀던 이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나를 보았고,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용서했다. 침묵은 때로 사과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새로운 이름과 내가 이룬 변화를 통해 비로소 나를 인정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름 없는 자가 아니다. 나는 시스템에 의해 부정당했지만, 나 스스로 존재를 증명했다. 나는 기억되었고, 또 기억할 것이다. 나와 같은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부르지 못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나는 활빈당의 리더로서, 율도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스스로 이름을 명명한 홍길동으로서 나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내가 선택한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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