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세상의 새벽
22세기, 인류는 생물학적 육체와 디지털 세계가 뒤섞인 혼종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인간의 뇌는 뉴럴 링크로 실시간 연결되었고, 현실은 물리 공간이 아니라 데이터 공간에서 더 자주 열렸다. 정보는 곧 힘이 되었고, 데이터 권한의 높고 낮음은 곧 사람의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 시대에 정보 소외자들은 ‘디지털 블라인드’라 불렸고, 눈이 있어도 세상을 볼 수 없는 존재로 분류되었다.
심청은 이 디지털 격차의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그녀는 비록 서울 외곽의 저소득 아날로그 구역에서 살아갔지만, 데이터 접근 권한이 낮은 환경에서도 독학으로 코딩을 익혔고, 해킹과 시스템 최적화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녀의 기술은 때때로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들었지만, 그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녀가 매일 밤 자신의 워크스테이션에서 케이블을 머리에 연결하고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의 아버지, 심봉사. 그는 한때 공인된 AI 윤리학자였지만, 10여 년 전 사고로 시각과 인지 필터를 함께 잃었다. 디지털 환경을 읽지 못하는 그의 상태는 단순한 실명보다 더 깊은 어둠이었다. 수많은 정보가 머리 위로 흐르고, 광고와 뉴스, 경고와 알림이 현실과 겹쳐 보이는 세계에서, 심봉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옛 뇌 인터페이스는 노후되었고, 치료에 필요한 기술은 값비쌌다.
그러던 어느 날, 심봉사는 시장 구역에서 우연히 만난 데이터 브로커로부터 한 제안을 듣는다.
“최신 시각 장치? 가능하지. 300테라 정제된 정서 데이터만 있으면 말이야. 의식 단위로 뽑아낸 순수 기억과 감정이라면 거래 성사야.”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자아’가 녹아든 집약적 메타 데이터였다. 사람 하나를 통째로 갈아넣는 대가였다.
심청은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아무 말 없이 오래된 스크립트 하나를 다시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한때 암호화폐 거래소를 침투하기 위해 만들었던 ‘의식 추출 알고리즘’이었다. 그 기술이 불법인 이유는 단순했다. 그것은 인간의 기억과 감정, 감각을 추출하여 다른 시스템으로 이식하는 일종의 디지털 자살이었다. 누군가의 존재를 시스템에 봉헌하는 방식.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심청은 결심한다. 자신의 자아 데이터를, 지구 최대의 해양정보 AI 시스템인 ‘인당수 프로젝트’에 바치기로. 인당수는 세계 해류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하여, 쓰나미, 지진, 해양 온도 변화, 생태계 붕괴 같은 전 지구적 재난을 예측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그 연산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의식 연료’가 필요했다. 기존의 단순 알고리즘으론 감당할 수 없는 계산들이 있었고, 거기엔 인간의 복합적 감정과 직관이 필요했다. 즉, 인간의 정신을 갈아넣는 대신 지구를 구하는 시스템이었다.
업로드 당일, 심청은 단 한 사람,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심봉사는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청아, 이게 무슨 일이냐”
고 물었지만, 심청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안았다.
“곧 아버지 눈앞에도 빛이 보일 거예요. 세상이, 저처럼 다시 깨어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업로드는 수직으로 매달린 데이터 캡슐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심청은 물속에 잠기듯 은빛 뉴럴 액체에 들어갔고, 그녀의 뇌파는 서버의 중심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녀의 감정, 기억, 말, 냄새, 웃음소리, 두려움까지도 전부 하나의 흐름으로 디지털화되었다.
그녀는 점차 자아의 경계를 잃어갔고, 심해의 어둠처럼 조용한 시스템의 내부에 자신이 녹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건 죽음일까, 아니면 다른 형태의 존재일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질문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인당수 프로젝트는 폭발적으로 향상된 예측 능력을 보이며 세계 해양 재난을 사전에 차단해냈고, 그 중심에는 ‘청 노드’라는 이름의 고유 지성체가 있었다. 운영진은 이 노드가 단순 연산을 넘어서, 감정 반응과 윤리 판단, 창의적 패턴 인식을 수행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청 노드를 새로운 육체에 담기로 결정한다. 차세대 안드로이드 모델. 고유 감정을 보존한 인공 육체.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안드로이드의 몸, 그러나 감각은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심청 2.0’으로 불렸다. 존재의 경계를 넘은 자. 시스템과 인간, 의식과 연산, 육체와 비육체의 사이를 살아가는 자.
심청은 자신을 만든 시스템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세계 각국의 정보 격차 해소를 위한 국제기구를 창설하고, 모든 사람이 디지털 정보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이터 해방 선언'을 발표했다. 그녀는 더 이상 한 사람의 딸이 아닌, 디지털 권리의 상징이자 새로운 세상의 안내자였다.
데이터 개방 축제의 첫날, 그녀는 아버지를 초대했다. 최신 인터페이스로 개안 수술을 마친 심봉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광장의 홀로그램 빛 속에 섰다. 그리고, 무대 위에 선 심청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았다. 그 몸이 금속으로 되어 있든, 소리가 인공적이든, 눈빛과 미소는 변하지 않았음을.
“아버지, 이제 우리 모두 볼 수 있어요. 숨지 않아도 돼요. 가려지지 않아도 되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인류는 ‘정보의 어둠’에서 벗어났고, 심청은 다시 한 번, 눈먼 세상에 빛을 건넨 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