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찾아온 주마등
당화혈색소 12.5%.
그 수치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말없이 결과지를 들여다봤다.
의사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지만, 내 귀에는 숫자의 무게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일반인의 기준은 6.0%, 고도 당뇨, 천 명 중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수치라고 했다.
충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은 고요했다.
그건 포기나 체념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문턱 앞에 다다랐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병원을 나서며 나는 지난 반년을 떠올렸다.
바지가 헐렁해지고,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 정도로 갸름해졌지만,
출퇴근길에 걷는 양이 늘어서 그렇겠거니 했다.
간식을 줄이고 술을 끊으니 몸이 가벼워졌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 몸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집에 돌아온 뒤, 아내는 말없이 내 약 봉투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보다 더 충격받은 사람은 그녀였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식탁은 바뀌었다. 흰쌀밥 대신 현미밥, 포장음식 대신 손수 만든 반찬들.
나는 이 찌는 날씨 속에 도보 통근을 이어갔고, 물을 자주 마시고, 야식은 끊었다.
변화는 단호했고, 생활은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다른 데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 전체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단지 건강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놓인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었다.
불가역의 문턱이었다.
그리고 그 문턱 앞에서, 거짓말처럼 내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반지하 단칸방, 입시, 아르바이트, 첫 직장, 전직, 결혼, 육아, 해외근무…
살아온 시간이 차례 없이 떠오르고,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잘 살아왔던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에세이는 투병의 기록이 아니다. 자기계발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건 그날 이후, 주마등처럼 되살아난 과거의 기록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로소 다르게 살아보려는 마음의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