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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KN과 구멍가게

수십년간 이어졌던 가난의 시작

by KOSAKA

내가 태어난 해는 1972년이다. 미국과 중국은 국교 정상화를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0월 유신이 선포됐으며, MBC가 국내최초로 컬러TV 시험방송을 시작했던 격동의 한해였다.


물론 아쉽게도 생물학적 한계(?)로 내가 태어나던 해의 일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3살 무렵부터의 일이다.


수유리 화계사 인근 버스 종점 옆에 조그마한 수퍼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집이었고 하나의 세계였다. 20평 남짓한 공간이었을까. 부모님은 그곳에서 식료품과 생활잡화를 판매하며 생활을 영위했다.


나는 진열대 사이를 오가며 뛰어놀거나, 수퍼에 붙어있는 방에 앉아 AFKN과 세서미 스트리트를 보며 심심함을 달랬다. 나에게 그 공간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충분히 쾌적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로 외출을 했다. 장을 보러 간다고 했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지만 3살짜리 아이가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지는 않는다. 며칠 뒤, 아니 어쩌면 몇주 뒤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돌아왔다. 여동생이었다.


세 식구에서 네 식구가 되었고, 쾌적했던 공간은 심리적으로 좁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나는 오래도록 받아들이지 못했던 느낌인데, 아이들은 대개 그렇게 살아간다.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순응한다.


대부분의 아기들이 그렇듯 동생도 종일 잠든 채였고, 부모님은 잠든 아기를 깨우지 말라며 나와 아기를 방에 내버려둔 채 수퍼에서 열심히 일을 하셨다. 그 시절 어디 아이를 맡길 곳도, 그럴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바로 집앞이 버스 종점이니 나에게 어디 나가서 놀라고 하기에도 부모님 입장에서는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AFKN과 세서미 스트리트는 항상 거의 묵음에 가까웠는데, 그런 상황에 대한 반항인지 답답함 때문인지, 나는 종종 짐짓 TV 소리를 키워 아기가 잠에서 깨 울면 “야~ 깼다”며 크게 키운 볼륨이 정당하다는 듯이, 부모님께 내 목소리가 들리도록 크게 소리치곤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름의 반항이었고, 내 존재감의 확인이었다 .


하루는 우유가 몹시 마시고 싶었나보다. 아니, 어쩌면 그저 하나의 철없는 장난이었을 것이다. 냉장고는 비어 있었지만, 가게 진열장에는 우유가 수북했다. 하나를 집어 들고 뒤꿈치를 들어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나서려던 순간, 계산대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뒤에 뭐 있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고는 뛰쳐나왔다.


훗날, 그 이야기를 꺼낸 아버지는 “혼내줄까 하다가 도망치는 네 뒷모습이 짠해서 그냥 놔뒀다”고 했다.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단지 우유가 먹고 싶었던 아이였고, 아버지는 아이에게 무신경하고 무뚝뚝했던 남성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방식을 모르는 당시의 평범한 한 어른이었다.


그래도 버스 종점의 차장들에게 나는 인기있는 아이였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음료수 등을 사기 위해 수퍼에 온 차장 누나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고 한다. 그 누나들의 노래와 내 춤이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됐는지 지금 생각하면 궁금하긴 하다.


나의 AFKN과 우유와 버스 차장들과의 놀이(?)는 즐거웠지만, 그 조그마한 수퍼는 몇해 가지 못했고, 부모님은 그곳을 정리하고 신림 6동 시장통으로 이사를 했다. 간판은 수퍼지만 이른바 구멍가게 – 최근에도 아내와 함께 내 어릴적 살던 곳을 보기 위해 그 동네를 찾아갔는데 그 수퍼는 그 구멍가게 사이즈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 였던 그곳은 우리 네 가족의 생계를 떠받치는 데 실패했던 것 같다.


당시는 당연히 가난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지만, 그 가난은 그 이후로 수십년간 나와 우리 가족을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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