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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벽에서 책으로

영어 선생님과 4권의 책

by KOSAKA

벽을 보며 울며 서있던 소년이 중학생이 되었다.


내가 입학했던 중학교는 남녀 공학의 신설 학교였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소규모 학교였는데, 당시 어느 학교나 그러했듯, 한반이 50명이 넘었고, 한학년은 12개 정도의 학급이 있었다. 신설 학교이니 선배도 없고, 전교생 수는 많지 않았다.


1년 반 정도를 그 학교에 다녔었는데, 지금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는 걸 보니 무난한 학교생활이었던 듯하다. ADHD가 저절로 치료됐던 것일까.


2학년 여름방학 무렵 우리 집은 신림동에서 정릉으로 이사를 갔는데, 반지하 방에서는 탈출을 했으나 이번에는 요즘같으면 재개발 대상 1순위로 오를 법한, 한국전쟁 직후에 지어졌을 것 같은 단독주택이었다. 월세였는지, 전세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온전한 우리집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지하에서 탈출했으니 생활환경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전학을 간 중학교는 역시 신설학교였는데, 규모는 이전 학교와 비슷했고, 시설은 더 좋았던 기억이다. 이곳도 남녀 공학이었다. 이 시기에도 나는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의 180도 다른 각도의 눈치 속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 누나같은 사춘기속 아이콘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사춘기였을 내 인성을 만들어준 것은 한명의 선생님과 4권의 책이었다. 전학간 중학교의 영어 선생님이 그 주인공인데, 그 분은 나에게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에게 큰 영감을 준 키팅 선생님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그분의 인상이 또렷이 떠오른다. 몹시 마른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단발 머리에 안경을 쓴 중성적 외모였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힘있는 목소리에, 종종 교과서에는 없는 해외 작가, 문학 작품 등에 대해 설명해 주시곤 했다. 점심시간이면 교정 어딘가 홀로 앉아 시집을 읽고 계시기도 했다.


아마도 내 학창시절 전체를 통털어 유일하게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다른 선생님들은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 선생님은 지금도 그 성함이 기억날 정도다. 당연히 내 영어 성적도 좋았다.... 수학선생님도 좋아했어야 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가 권해주신 삼국지는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아마도 해적판이었을 후삼국지가 기억에 남는다.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전역이 혼돈했던 5대 10국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었는데, 등장인물들이 장비의 손자, 제갈공명의 손자 등 삼국지 주인공들의 후손들이 활약하는 흥미진진한 줄거리였다.


중국 역사에 대한 나의 천착은 계속되어 그 2단 세로쓰기 양장판의 5권짜리 열국지도 읽게 되었다. 1권에 600~700페이지 분량은 됐던 것 같고,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내용인데 등장인물은 아마 수천명에 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줬던 책들은 따로 있었다. 먼저 소설 丹이라는 책이 잊혀지지 않는다. 사춘기의 나에게 국뽕을 깊숙이 심어줬던 책이기 때문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책은 작가가 증산도와 도인을 찾아 듣고 겪은 내용을 기록한 일종의 르포였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얘기, 증산도에 대한 얘기, 우학도인을 만나 들은 얘기....


그중 우학도인이 했던 얘기 중 지금도 기억나는 몇가지는, 미스터/미스같은 호칭이 사라진다, 우리나라가 자동차생산량 세계 5위의 나라가 된다, 우리 문화가 전세계에 울려퍼진다, 일본이 몰락한다 등 80년대 초반의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그런데 그 우학도인의 얘기가 지금 돌아보면 대부분 맞지 않는가.


두 번째 잊혀지지 않는 책은, 모모라는 제목의 독일 소설인데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사람들에게 찾아 주는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라는 소재를 물성을 가진 것으로 다루는 이야기 전개도 신기했지만 전체적으로 문장과 분위기가 참 따뜻했던 기억이다. 많이 좋은 책이었는지, 지금도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중이다.


세 번째 잊혀지지 않는 책은, 이 땅의 사춘기 소년소녀 99%가 접해봤을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라는 소설이다. 책에서는 결국 유리알 유희가 정확히 구슬치기라는 것인지 그 놀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헤르만 헤세 특유의 신비롭고 철학적인 느낌이 참 좋았다. 이 유리알 유희를 읽고 다른 헤르만 헤세의 책도 몇권 읽었던 것 같은데 별로였는지 기억에 남는 책은 없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책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이다. 영어 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된 책인데, 시집의 제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 한편 한편이 사춘기 청소년의 정서를 아리게 만드는 깊이가 있었다. 내가 시집을 다 읽다니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했다.


당시 나로서는 독서가 궁핍한 내 생활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그때는 당연한 듯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부모님께서는 자식이 원하는 책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아 새삼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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