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아이의 산만함, 그러나 부모님의 감사한 훈육
'국민학교' 1학년. 어느새 나는 책가방을 메고 교문을 드나드는 어엿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신림9동 어느 2층 양옥집 반지하로 이사를 했다. 위층에는 주인집 가족이 살았고, 내 또래의 자매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과 계단에서 마주칠 때마다 이유 없는 위축감을 느꼈다. 말수가 줄었고, 눈을 피했다. ‘다르다’는 건 어릴 적부터 몸으로 먼저 배운다. 빈부격차라는 단어는 몰랐지만, 빈부격차라는 감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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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만한 아이였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걸 힘들어했고, 눈앞에 있는 것에 쉽게 지루해졌다. 그러다 무언가를 건드리거나 망가뜨리는 일이 잦았다. 화면 양옆에 붙은 TV 스피커가 궁금해져 젓가락으로 찔러본 적이 있다. 당연히 고장이 났다.
동생과 놀다가 휴지통에 불을 질러 집이 탈 뻔한 적도 있었고, 겨울날 강아지에게 찬물을 끼얹어 결국 생명을 잃게 만든 일도 있다.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간다기에 가지 말라고 몸싸움을 벌였고, 그 일로 우리는 절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의 충분한 양육을 받지 못해 생긴 ADHD가 아니었을까.
선생님께 혼났던 날도 기억난다. 수업 시간에 지나치게 떠들자 선생님은 참다못해 “그렇게 떠들 거면 나가!” 하고 외치셨다. 나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책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그 일은 어머니가 선생님께 찾아가 석고대죄 하며 끝이 났다. 선생님이나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 일을 저질러도, 부모님은 나를 한 번도 세게 혼내지 않으셨다. 손찌검도 없었다. 어쩌면 생계를 유지하느라 우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안함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아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교육방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부모님의 훈육방침에 지금도 감사한다.
내가 받았던 가장 강한 벌은 벽을 향해 서서 코를 대고 10분을 있는 것이었다. 혼자 벽을 보고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들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고립은 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벌을 받다가 울음을 터뜨리면, 아버지는 조용히 다가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하고 말하셨다.
그 시절의 기억은 모두 이렇게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몇백 원짜리 프라모델을 사서 공터에 앉아 조립하던 날들. 막내고모가 집에 와 며칠 지내다 갈 때면 나는 하루 일과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고, 고모는 잘 들어줬다. 아버지가 가끔 과자를 사오셔서 신문지를 펴고 과자들을 한데 부어놓으면, 온 가족이 둥그렇게 앉아 집어 먹었다. 과자도, 가족도 그 시절엔 늘 소중했다.
방학이 되면 수유리에 있는 할아버지 댁이나 돈암동 고모네로 며칠씩 보내졌다. 지하철이 드물던 시절이었기에 버스를 타야 했고, 긴 시간 차를 타면 늘 멀미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타기 전 먹은 음식들을 도로 확인하듯 토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지하방을 벗어난 며칠은 자유롭고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수입은 늘 불안정했고,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반대하셨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동네의 개척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우리도 따라갔다. 그 교회는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고, 나는 지금도 그 좁고 굽이진 길을 기억한다. 신앙보다도, 어머니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만든 작은 세계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말수 적은 분이셨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을 먹으면 확실히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하루는 바둑판을 꺼내 앉아보라 하셨고, 바둑의 기초를 설명하는 책을 주시며 바둑에 대해 기초부터 설명해주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13점 접바둑으로 내게 바둑을 가르치셨다. 바둑을 두며 나누는 부자간의 대화도 생각해보면 소중한 시간이었다.
또 하루는 커다란 종이 박스를 풀며 “이건 꼭 읽어야 한다”며 삼국지 12권 전집을 주셨다. 당시 집안 상황을 생각하면 당신은 아들에게 큰 투자를 하신 것이다. 잦은 이사 속에 그 책들을 잃어버리기 전까지 다섯 번쯤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삼국지라는 책은 초등학생에게 적합한 내용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은 초등학교 5~6학년 무렵, 삼촌 집에 놀러 갔을 때 일어났다. 삼촌은 애니메이터였고, 집에는 일본 만화책이 가득했다. 세련된 그림체와 기묘하게 생긴 일본어 문자. 나는 그 조합에 빠져들었다. 삼촌에게서 ‘소년 선데이’라는 일본 만화 주간지 한 권을 빌려온 뒤, 뜻도 모른 채 수십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반복은 언어의 문을 연다. 나는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익혔고, 결국 ‘독학 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알파벳과 헬로우를 외울 때, 내 노트에는 일본어 음절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만화잡지 한 권이 내 일생을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나는 일본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는 회사원이고, 주말에 고층 아파트 거실에서 오사카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방바닥에 엎드려 하얀 노트에 그림 그리듯 일본어를 끄적이고, 아버지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귀여운 한 소년을 떠올리고 미소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