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의 내리막길 또는 기술의 중요성
수유리에서 신림동으로의 이사는 말 그대로 서울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의 이동이었다.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수유리의 조그만 수퍼가 더 이상 우리 가족의 생계를 버텨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신림6동의 첫 인상은 강렬했다. 동네 전체가 재래시장이었고, 시장은 계속되는 오르막길로 이어져 있었다. 비탈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에서 흘러나온 물과 버려진 채소 잔해, 종이 상자, 비닐들이 골목을 적셨고, 그 옆으로 흐르는 개천은 더 이상 개천이 아니라 하수와 폐기물의 통로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빵집을 시작했다. 제과점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작은 가게였다. 메뉴는 세 가지, 도너츠, 꽈배기, 찐빵 뿐이었다. 고용한 주방장이 만들 수 있는 게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주방은 그의 몫이었지만, 나머지는 부모님의 일이었다. 재료를 사고, 장사를 하고, 치우고, 계산하고, 내일을 걱정하는 일까지.
그때 어머니는 항상 여동생을 포대기에 싸서 등에 업고 지냈다. 동생은 바닥에 눕히면 곧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소리는 유난히 컸다. 결국 어머니는 업은 채로 하루를 보냈고, 그 덕분인지 동생의 두상은 참 예뻤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방해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또래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자 효도였다.
나는 동네 바보형이라 불리던 아이와 그의 동생과 자주 어울렸다. 그 형은 항상 웃고 다녔고,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을 많이 받았지만 화내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종종 동네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공사장까지 뛰어갔다. 나중에야 그곳이 미림중고등학교 부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얀 돌을 주워와서, 골목 벽과 바닥에 낙서를 하며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공사장 탐험은 정말 위험한 놀이였지만, 그땐 위험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나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주방장이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주방장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빵집도 곧 문을 닫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말하길, 기술 없는 자영업은 쉽게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업은 접혔고, 가게와 붙어 있던 살림집도 떠나야 했다.
이삿짐은 신림2동으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이번엔 임야 거래 전문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 밀가루 대신 등기를 다루는 일이었다. 작은 책상, 전화기, 지도 몇 장, 그리고 책자들. 아버지는 늘 동업자 또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거나 무언가를 필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고, 나는 점점 그 풍경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신림2동에서의 기억 중 하나는 소독차였다. 당시엔 위생 관리 차원에서 동네 골목마다 흰 연기를 뿜으며 돌아다니는 소독차가 있었다. 요란한 엔진 소리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뿌연 연기. 동네 아이들에게 그것은 축제였다. 일상의 권태를 무너뜨리는 거의 유일한 비일상이었고, 나는 늘 그 무리에 섞여 소독차를 따라 뛰었다.
그렇게 동네를 누비고 다니던 나는 어느새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입학식 날, 어머니는 동생을 여전히 등에 업고 내 손을 잡았다. 이제 막 글자를 배우게 될 아이의 손과, 울음 많던 갓난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그날 학교 운동장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또렷하게 기억된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또 하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작은 슈퍼, 빵집, 부동산, 그리고 초등학교. 생활은 자주 변했지만, 그것이 어색하거나 낯설지는 않았다. 아이는 변화에 대해 묻지 않고, 어른은 설명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변화들이 한 사람의 생애를 이루는 조각들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