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을 수 없는 것과 함께 사는 법
시간은 중년의 삶에서 가장 압도적인 감각이다. 젊은 시절에는 무한히 남아 있다고 믿었던 시간이 어느 순간 빠르게 줄어드는 듯한 체험으로 바뀐다. 나이가 들수록 하루는 더 짧게, 한 해는 더 빠르게 흐른다. 어느 철학자는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멈추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는 다만 그 위를 떠내려갈 뿐이다.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이 매일 같은 시각에 종을 울리고 기도하며 시간을 엄격히 관리했다. 기도의 시각, 노동의 시각, 휴식의 시각이 모두 신의 질서에 속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엄격한 시간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근대 사회의 시계 문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세인에게 시간은 신의 소유였고, 근대인에게는 생산과 효율의 도구였다. 중년의 나에게 시간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개인적인 자원, 그리고 동시에 가장 냉정한 심판관이다.
젊을 때는 ‘언제든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 그것이 과연 내 남은 시간 안에 완수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습관이 생긴다. 그 계산은 때로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두렵다. 시간은 내가 붙잡고 싶은 것들을 하나둘 떨어뜨려 버린다. 부모와의 이별, 아이들의 성장, 친구들의 변화, 몸의 노화가 모두 시간의 흔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원망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더욱 분명히 자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중세 수도사들이 시간을 신과의 만남의 질서로 삼았듯, 우리도 시간을 자기 삶의 질서로 삼을 수 있다. 일정한 루틴, 꾸준한 기록, 반복되는 습관 속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여가는 것이 된다. 글을 쓰는 일도 그 중 하나다. 매일 흘러가는 시간을 언어로 붙잡아 두려는 몸부림은 결국 내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시간이 단순히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현재 속에 겹쳐 들어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현재의 기대와 두려움 속에 스며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다가올 일에 대한 상상은 오늘의 태도를 바꾼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층위에 가깝다. 따라서 중년의 시간은 단순히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 무게를 견디는 법은, 어쩌면 시간의 일부를 의식적으로 ‘비워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 목적 없는 산책, 시계를 보지 않는 저녁 같은 순간들이다. 이런 공백 속에서 시간은 다시금 확장된다. 짧아진 하루가 오히려 길게 느껴지고, 남은 삶이 더 풍요롭게 다가온다. 시간을 완전히 다스릴 수는 없지만, 그 흐름에 작은 저항을 건네는 방식이다.
알파벳 T는 두 팔을 벌린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시간의 강을 양쪽에서 붙들려는 듯, 혹은 다가오는 것을 막아내려는 듯한 형상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몸통은 아래로 길게 뻗어 땅에 닿아 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땅 위에서 그저 버티며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직립은 의미가 있다. 흐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 그것이 중년의 시간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세다.
시간은 언젠가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 우리는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모품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며 쌓아가야 한다. 중세 수도사들이 종소리로 하루를 쪼개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작은 글, 작은 만남, 작은 성찰로 시간을 조각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시간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바로 삶의 서사이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남을 무늬다.
두 팔을 벌린 채 흐르는 강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당당히 서서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맞이하는 자세. 그것이 중년이 시간을 대하는 법이고,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삶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