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U와 GPU가 가르쳐준 역사라는 시스템
AI시대를 이끄는 첨단 기술의 집적체가 왜 CPU가 아닌 GPU인가라는 내용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역사의 발전원리와 동일한 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처리장치, 즉 CPU는 소수의 정예병과 같다. 복잡한 논리를 처리하고, 어떤 어려운 명령이 떨어져도 막힘없이 수행하는 고급 문제 해결사다. 반면 그래픽처리장치인 GPU는 전혀 다른 존재다. 수천, 수만 개의 단순한 코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CPU에 비할 바 없이 소박하다.
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백만 개의 픽셀을 한꺼번에 계산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병렬로 처리하며, 오늘날 인공지능의 핵심 동력이 된다. 이 시대를 연 힘은 압도적으로 강한 하나가 아니라, 약하지만 많이 연결된 계산 단위들의 집합이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도 이와 비슷한 궤적을 그려왔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위대한 영웅이나 천재적인 지도자, 이른바 ‘CPU형 인물’이 이끌어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꾼 결정적인 순간을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늘 보잘것없는 개체들이 군집을 이루어 만들어낸 ‘GPU형 혁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대 전쟁의 풍경은 이 대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 전쟁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영웅들의 일대일 결투로 기억된다. 개인의 무용이 곧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개인 영웅이 아니라 그리스의 밀집 보병 대형, 팔랑크스였다. 팔랑크스를 구성한 병사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농사를 짓던 이들이 방패와 창을 들고 전장에 나섰을 뿐, 한 명씩 떼어 놓으면 전문 기병이나 용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깨를 맞대고 방패로 서로를 가리며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개별의 약점은 집단의 결합 속에서 상쇄되었고, 이 병렬적 구조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무너뜨렸다. 화려한 영웅 한 명의 칼춤보다, 평범한 다수가 발을 맞춰 내딛는 한 걸음이 역사의 지도를 다시 그린 셈이다.
경제의 역사 역시 ‘약한 자들의 연대’가 승리해온 과정이다. 중세까지 거대한 자본은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개인의 힘으로는 대양을 건너는 무역선이나 대규모 광산 개발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는 제도가 등장하면서 판이 바뀌었다. 시장통의 상인과 이름 없는 시민들이 모은 소액의 자본은, 개별로는 미미했지만 주식이라는 장치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그렇게 형성된 ‘GPU형 자본’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섰다. 한 명의 거대 자산가가 감당해야 할 위험과 판단을, 수만 명의 참여자가 분산해 떠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산업혁명 또한 같은 원리 위에 서 있다. 장인의 숙련된 손기술은 CPU에 가까웠다. 한 명의 장인이 모든 공정을 책임지는 방식은 품질은 뛰어났지만, 생산량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반면 분업과 조립라인은 달랐다. 거기에는 고도의 기술을 지닌 장인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각자의 위치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작업들이 병렬로 이어질 때, 생산성은 장인 한 명의 능력을 수백, 수천 배로 넘어섰다. 개별 노동자의 숙련도는 낮아졌을지 몰라도, 시스템 전체의 출력은 인류를 빈곤에서 대량 생산과 대중 소비의 시대로 이동시켰다.
지식의 축적과 전파 역시 다르지 않다. 과거의 지식은 소수의 현자와 수도사들의 머릿속에 머물렀다. 그들은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었지만, 그 지식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제한적이었다.
금속 활자의 발명은 지식을 잘게 쪼개 대중에게 풀어놓았다. 수많은 평범한 독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읽고, 기록하고, 비판하고, 공유했다. 오늘날 위키피디아나 오픈소스 생태계가 보여주는 집단 지성은, 한 명의 천재가 쓴 저작보다 더 방대하고 더 빠르게 진화하는 GPU형 지식 처리의 결과다.
결국 역사는 ‘강한 소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약한 다수’가 연결되며 구조를 바꿔온 과정에 가깝다. CPU가 방향을 설정하고 복잡한 판단을 내린다면, 실제로 시스템을 지탱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GPU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존재들이다.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유도 사자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연결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협력으로 보완하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경쟁력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인공지능 혁명 역시 이 오래된 진리의 현대적 재현일지 모른다. 가장 인간다운 지능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가장 단순한 계산 단위들을 무수히 병렬로 연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뉴런이라는 미약한 세포 수십억 개가 모여 의식을 만들어내듯 말이다.
진정한 위대함은 압도적인 하나에서 나오지 않는다. 미미한 존재들이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끝없이 연결될 때, 비로소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코어에 불과하지만, 함께 박동할 때 역사는 다음 장으로 넘어갈 힘을 얻는다.
새해를 맞아 이 이야기를 삶에 그대로 가져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종종 더 뛰어난 하나가 되려 애쓰느라,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들의 힘을 과소평가하곤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 크지 않은 선택, 느슨하지만 지속되는 관계들. 그 하나하나는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삶의 방향은 언제나 그런 요소들의 합으로 결정된다. 각자가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고, 속도가 느려도 문제는 없다. 서로의 리듬이 크게 어긋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면, 삶 역시 조용히 앞으로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