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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7. 2024

파스칼 키냐르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책과 독서와 글쓰기의 침묵이라는 접합부...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의 세계가 좋다. 어느 책에서나 형성되어 떠오르며 퍼지는 구름 속에 있는 게 좋다. 계속 책을 읽는 게 좋다. 책의 가벼운 무게와 부피가 손바닥에 느껴지면 흥분된다. 책의 침묵 속에서, 시선 아래 펼쳐지는 긴 문장 속에서 늙어가는 게 좋다. 책이란 세상에서 동떨어졌으나 세상에 면한, 그럼에도 개입할 수 없는 놀라운 기슭이다. 오직 책을 읽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고독한 노래이다. 책 외적인 것의 부재, 인간의 모음 발성 및 군상에서 최대한의 격리, 그리하여 책은 세상이 출현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된 심오한 음악을 허락하여 불러들인다...” (p.9)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글을 좋아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문단도 좋아하고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도 좋아한다. 심지어 파스칼 키냐르의 단어 또한 좋아한다. 그의 책들 중에는 마지막 왕국 시리즈라는 부제가 붙은 것들을 특히나 좋아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는 2002년에 시작되었고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은 2020년에 출간된 것으로 마지막 왕국의 열한 번째 저작물이다. 

  “... ‘문자 현상’은 글쓰기의 기원 이래로 이미 지속적으로 표기가 이루어지는 일체의 것, 가령 절벽의 화석에, 식물의 잔해에, 육식동물의 물어뜯긴 상처에, 젖을 빠는 젖먹이의 앞으로 내민 입술에, 수유를 하느라 풀어헤친 어머니의 젖가슴에, 우리가 뒤쫓는 야수들이 남긴 배설물과 그들의 고기와 습성과 모피와 상아와 뿔에 새겨지는 비인간의, 지옥의, 신의, 자연의, 야생의, 물질의 글쓰기 일체를 포괄한다...” (p.55)

  이전에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마지막 왕국’ 시리즈의 저작물은 네 권이 더 있다. 2001년에 마지막 왕국의 여덟 번째 작품인 《은밀한 생》(1998)이, 2003년에 《떠도는 그림자들》(2002)이, 2010년에 《옛날에 대하여》(2002)와 《심연들》(2002)이 번역 출간되었다. 마지막 왕국 시리즈에 속하는 책들은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그렇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저 이야기의 박물관 같고 언어의 박람회 같다. 

  “나는 침묵 속에서 독서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글쓰기란 침묵 속에서 계속 책을 읽는 일이다... 글쓰기란 더 이상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그 무엇의 침묵 속에서 우리가 보지 않는 무엇을 읽는 일이다.” (p.157)

  파스칼의 이번 책은 ‘책’으로부터 시작되고 책의 중간중간에도 책, 독서, 글쓰기 등이 거론된다. 나는 책과 독서와 글쓰기와 침묵이 한데 엮이는 장면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의 접합부에 침묵이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지점을 이제야 제대로 들여다본 느낌이다. 그토록 수다한 것들을 가두기에 침묵보다 나은 것이 있을리 없다.

  “독서의 침묵. 침묵은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향성 폭발을 일으키는 거대한 공명인 어둡고 광대무변한 삼라만상의 우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침묵은 언어세계의 기이한 위탁물이다. 17세기부터 완전히 기보된 음악은 침묵에 부쳐진 구어의 끌리는 옷자락의 농축물이다.” (p.169)

  파스칼 키냐르의 발화를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발성처럼 읽어댄다. 해석하기 위하여 읽지 않고 혼돈으로 빠져들기 위하여 읽는다. 기이한 경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볼 뿐, 되도록 그 너머를 넘겨 짚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애쓴다.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물의 수면을 얼른 지나가기 위하여 애쓴다. 과호흡이 일어나도 멈추지 않으려 한다. 한 번의 쉼도 없이 건너편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 그리스인들은 문인들lettrés이라 말하지 않고 엉덩이가 창백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태어난다. ‘수없이 많은 다른 삶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삶을 증가시킨다... 독자는 시대, 연령, 시간과 무관한 존재이다. 독서는 꿈꾸기가 아니지만 독자가 시간을 잃는다는 점에서 꿈꾸기와 흡사하다. 참된 모든 작품은 시간 안에서 시간을 망각한다. 꿈처럼 시간성의 분리를 알지 못한다...” (pp.174~175)

  읽는 동안이 꿈결 같기를 희망한다. 내가 읽은 것이, 꿈결에 들은 것이어서, 믿기 힘들기를 바란다. 내가 읽은 것이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로, 형체가 없는 유령처럼 환각되기를 바란다. 파스칼 키냐르를 읽는 동안 어느 때는 성공하고 또 어느 때는 이에 실패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이, (종종 나조차 속지만) 내 안에서만 알 수 있는 어떤 리듬에 내가 실렸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갈린다.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 / 송의경 역 /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마지막 왕국 XI (L’Homme aux trois lettres―Dernier royaume XI) / 문학과지성사 / 278쪽 / 20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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