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삶에 어느 순간 생겨났다가 사라진, 그렇게 '앙금'처럼 남은 이야
‘나는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쪽을 훨씬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게 모아 놓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은 일련의 글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에 의하여 일련의 거친 가공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다. 그래서 글들은 그저 채록된 이야기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게 무슨 맛이지, 궁금한 정도의 맛은 지니게 되었다.
“내가 여기 수록한 문장을 ‘스케치’라고 부르는 건 이것이 소설도 논픽션도 아니기 때문이다. ‘재료’는 어디까지나 ‘사실’이며, ‘형식’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만약 각각의 이야기 속에 뭔가 기묘한 점이나 부자연스런 점이 있다면,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 읽는 데 그다지 인내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소설이기 때문이다.” (pp.14~15)
「레더호젠」
아내의 옛 동창생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그녀의 부모가 이혼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중심에는 레더호젠, 이라는 독일식 멜빵 바지가 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몇 번의 이혼의 위기가 있었지만 잘 견뎌냈던 부부, 그 중 아내 쪽이 어느 날 독일로 여행을 가게 되고, 남편은 레더호젠 바지를 선물로 부탁한다. 그리고 아내는 독일에서 남편의 레더호젠을 사기 위하여 남편과 비슷한 체형의 사람에게 대신 치수를 재고 입어봐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레더호젠을 입은 모습을 보는 순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참기 힘든 혐오감을 느끼게 되고, 그 이후 남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밀한 소설적 가공을 거치지 않은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원석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이것대로 또 볼만하다.
「택시를 탄 남자」
미술 잡지에 화랑 탐방 기사를 쓸 때 만났던 화랑 주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충격을 준 그림을 소개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그 화랑 주인이 꺼내 든 것이 바로 <택시를 탄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 이야기이다. 화랑 주인이 뉴욕에 있을 때 만났던 독일인 화가 지망생, 그 지망생으로부터 소개 받은 한 체코인의 그림인데, 그 체코인은 삼 년 전 미국으로 망명을 뉴욕에 도착한 첫 날 그가 바라본 택시를 탄 사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십수 년 전의 그림인데, 바로 몇 해 전 이 화랑 주인은 그리스 여행 중에 바로 그 그림 속 택시를 탄 남자, 그 남자를 만났다, 는 이야기이다.
「풀사이드」
회원제 스포츠클럽에서 만난 사내가 해준, 사내가 서른 다섯 살이 된 시점의 어떤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빠르게 성공한 사내는 스물 아홉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치과 치료, 다이어트 식단, 술과 담배의 절제, 그리고 운동을 통해 다시금 자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애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를 내게 해주면서 이렇게 묻는다. “자네는 이 이야기의 재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어?”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모르겠어... 그렇지만 난 자네 이야기에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소설가의 눈을 통해서 말해도 좋다면. 그러나 대체 이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있는가 하는 건 실제로 손을 움직여 원고지에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그런 거야. 내 경우에는 문장으로 만들어보지 않고는 사물의 모습이 제대로 잘 보이지 않아.” (p.84)
「지금은 죽은 왕녀를 위한」
스물하나의 젊은 내가 만났던 ‘귀하게 자라서 그 결과 대책이 없을 정도로 버릇없는 예쁜 소녀’였던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어느 날 밤의 짧은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러 친구들과 뒤섞여 함께 잠들었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묘한 상황의 아침을 맞이한다. 젊은 나는 잠에서 깨어났으나 그녀의 팔 베개 노릇을 하고 있느라 일어나지 못하고 잠든 체 한 채 몸을 뒤척여 그녀를 안는다. 그녀 또한 아마 깨어 있었겠으나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를 안는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햇살이 방으로 들어서는 무렵 몸을 떼고 다시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하루키는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람과 한 차례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하루키에게 자신과 아내는 어린 자식을 잃었고 그로 인해 힘들었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노라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한 번 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하루키는 아직 전화를 하지 않았다, 는 이야기이다.
「구토 1979」
‘오래된 레코드 수집가’이며, ‘친구이 애인이나 부인과 자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와 종종 만나 레코드를 교환하며 위스키를 한 잔 하고는 하는데, 그때 그가 해준 이야기로 ‘예의 친구 아내’와 자고 난 1979년 6월 3일 밤에서 7월 14일까지 계속되었던 구토에 대한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시기에 그에게 걸려왔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를 피하다」
어느 비오는 날 술집에서 만났던, 오래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는 여인이 해준, 돈을 받고 몇몇 남자와 잠자리를 하였던 이야기이다. 그녀는 회사의 사정에 의하여 직장을 그만두고 나름의 ‘휴가’ 기간에 모두 다섯 명의 남자와 잤고, 그들로부터 돈을 받았다, 는 이야기이다.
「야구장」
아주 차밍한 글씨체를 가진 청년과의 만남에서 듣게 된 이야기이다. 소설가 지망생이며 습작품을 나에게 보냈던 청년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이 푹 빠져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야구장 근처에 집을 얻게 되고, 그 여자를 먼 거리에서 관찰하였던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는 점점 그녀를 관찰하는 행위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후 그녀를 만났을 때는 자신이 본 것들이 너무 세세하게 떠오르면서 오히려 불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헌팅 나이프」
바닷가 호텔에 묵는 동안 바로 바다의 부표 위에서 마주쳤던 여인의 이야기이자, 옆방에 머물렀던 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표 위에서 몇 마디를 주고 받았던 여인의 이야기와 모자 중 아들이 들려준 모자가 가지고 있던 병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아들이 보여준 헌팅 나이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소설을 쓰면서 사용하고 남은 어떤 이야기들을 ‘앙금’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에서 버려져도 좋은 이야기라는 것이 있을까...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일종의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한다...” (p.15) 하루키가 소설을 쓰면서 사용하지 않은 이야기는, 우리들 삶의 어느 순간에 생겨났다가 사라져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끔은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역 /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回轉木馬のデッドㆍヒ-ト) / 문학동네 / 2010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