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상, 그러나 소중하지 않다 치부하기엔 난감한 사람들
어떤 소설들은 이야기를 뛰어넘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황정은의 소설들이 그렇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황정은의 소설들은 이야기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를 조탁하는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빈곤한 이야기에 세련미 넘치는 언어의 옷을 입히는데, 그게 나름 힙스터의 면모를 지닌다. 주류 소설들과는 일정한 간극을 두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다.
“...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통해 흘러든 이야기의 즙으로 머릿속이 나른해진다. 애자가 일러주는 이야기처럼 만사를 단념하고 흐르게 된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하다.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럽지 않다. 본래 공허하니 사는 일 중엔 애쓸 일도 없다. 세계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해진다.” (p.13)
소설은 소라와 나나 자매, 그리고 나기라는 세 명의 인물의 시선을 빌러 진행된다. 소라와 나나에게는 애자라는 이름의 (두 자매는 엄마라는 호칭 대신 애자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엄마가 있다. 애자는 금주라는 이름의 남편을 잃은 이후, ‘전심전력’으로 사랑해왔던 자신의 사랑을 지속시키느라 이들 남매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금주씨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이후 그것을 삶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애자에게 세상은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한 공간일 뿐이었으니, 두 자매는 그들끼리 세상을 살아내야 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인 사실이기도 하다.
이처럼 애자로부터 방치된 자매를 거둬 먹인 것은, 한 집을 두 집으로 나눠 놓은 기이한 형태의 반지하 집에서 공간을 공유하였던 순자 그리고 그의 아들 나기에 의해서이다. 순자는 이들 자매를 자신들 쪽으로 불러 밥을 먹였고, 나기는 이들 자매와 공유할만한 몇몇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관계는 이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어, 자매는 나기의 가게에 들러 밥이나 술을 마시고, 매해 어느 시기가 되면 함께 모여 만두를 빚어서 나눠 먹는다.
이러한 주요 등장인물 이외에 나나가 잉태한 아기의 아버지인 모세씨 그리고 나기가 사랑한 그가 있다. 모세씨는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보는 사람’이며 ‘이쪽을 보고 있는데도 보고 있는지 의심이 들어 그 눈을 자꾸 보게 되는 사람’이다. 모세씨의 아버지는 아직도 요강에 볼일을 보는 사람이고, 모세씨의 어머니는 평생 군말 없이 그 요강을 비우고 씻는 사람이다. 그런가하면 나기의 과거에는 그가 있다. 그는 학창시절 나기의 흠모를 받은 사람이지만 그만큼 나기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이다. 나기의 일본 시절 그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역시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이처럼 비현실적인 인물 캐릭터이기 보다는 이들 캐릭터에게 부여하는 언어적 주술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진 자매와 사촌들을 구별하며, ‘물감으로 그린 듯한 사촌들과 간장으로 그린 듯한 우리 자매’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소설 속에 머물게 만든다. 또한 소설은 들여쓰기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데, 이 또한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제목과 맞물려 이상한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아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p.227)
소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한 세상과 그러한 세상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그저 소중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어떤 것들 사이, 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의 솔직한 방식이기도 하다. 때때로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 그러나 소중하지 않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난감한 사람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지탱하도록 만드는 (무의미와 의미라는 커다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란히 존재하는) 이 두 개의 벽 사이에서 (덕분에 계속)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황정은 / 계속해보겠습니다 / 창비 / 228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