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잠실을 떠나고 나서야 잠실을 들여다보게 되는...
중학교 2학년 때 용인에서 서울의 잠실로 이사를 왔다. 태어나 작은 도시들을 전전하며 살았던 내게 잠실에 위치한 거대 아파트 단지의 위용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단지 내부에서 종종 길을 잃었고,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 중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수를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아파트들의 집합체인 아파트 단지가 그 근처에만 네 개가 더 있었다. 나는 1단지에 살았고, 친구들은 같은 1단지에 살거나 2단지에 살거나 3단지에 살거나 4단지에 살거나 장미 아파트에 살았다 장미 아파트는 5단지이기도 한데, 1~4단지와는 달리 5단지는 평수도 넓었고, 높이도 다른 단지들이 5층짜리였던 것에 비해 15층짜리였다).
잠실 주공 1단지라고 불리던 그곳에서 시작된 서울 생활이 이제 삼십년을 넘어섰고, 보름 전 나는 잠실에서 녹번으로 이사를 하였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5, 6년 상계동에서 살았던 시절을 제외한다면 (나는 부모님들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한 이후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다시 상계동에서 잠실의 주공 2단지로 거처를 옮겼다) 25년 이상을 잠실 송파 지역에서만 살았다. 혼자 살고 동생과 함께 살고 결혼을 하여 지금의 아내와 살았던 그곳을 최근 떠난 것이다.
그렇게 집을 옮기게 되었을 때 혼란스러워 했던 것은 나보다는 아내였다. 아내의 고향은 서울 암사동이다. 아내는 암사동에서 태어나 강동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나와 결혼한 이후에는 지금까지 쭈욱 송파 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강동 송파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셈이었다. 아내는 애착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토착에 가까운 감정 탓인지 그곳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 처음 입주했을 땐 이웃들이 참 다양했다. 의사, 판사, 회계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도 있었지만 작게 사업하는 사람이나 회사원, 별다른 직업 없이 부모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 직업이 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전셋값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두 부류의 사람들만 나았다. 부모에게 사업이나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 아니면 ‘사’자가 들어간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p.203)
그렇게 떠나는 것에 사실 나는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로부터 지금의 아파트 단지들은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나는 소설 속에서 잠실의 밝은(?) 겉모양로 등장하는 새로운 잠실동보다는 잠실의 어두운 속살에서만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과거의 잠실을 두루 경험하였고 현재의 잠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보았지만 그 안에 거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고,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완전 평지에 새 아파트잖아? 서울 시내에도 평지에 이렇게 세대수 많은 단지가 세 개씩 몰려 있는 데는 여기밖에 없어. 백 퍼센트 지하 주차장이라 지상에 차가 안 다니는 것도 애들 키우는 입장에서는 큰 장점이고... 좀 욕심부리자면 대치동 학원들도 차로 금방이고...” (p.139)
소설은 현재의 잠실동에 사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밝은(?) 겉모양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좀더 치중한 모양새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주부들이 악어처럼 등장하고, 그 주부들이 휘두르는 바람의 자장 안에서 악어새처럼 활동하는 어두운 속살 쪽의 사람들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다. 소설은 심하게 양극화된 혹은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 그리고 그 양극화의 과정을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극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잠실은 70년대에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성했던 5층짜리 아파트 단지 네 개를 모두 밀어버리고 30층에 가까운 고층 아파트로 가득 채운,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와 가치관을 보여주는 전형과도 같은 동네입니다. 길고 날카로운 칼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고층 빌딩 숲 바로 건너편에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재래시장과 낮은 빌라촌이 공존하고 있지요. 강남을 선망하는 비강남권의 사람들에게는 강남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는 끊임없이 ‘진짜 강남’을 향해 해바라기하는 유사 강남 지역이기도 합니다. 행정구역상 ‘강남’이라 불리는 곳을 제외한 모든 동네가 유사 강남으로 변모하고 있는 요즘의 실정을 생각하면 비강남 지역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동네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사실상 신도시와 다름없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행태)을 여러 사람의 각도에서 비추어 봄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pp.459~460, 작가의 말 中)
지환엄마, 해성엄마, 태민엄마, 경훈엄마로 이름 붙여진 잠실동 사람들이 향하고 있는 지향점이 싫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잠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의 이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들이 지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잠실동’의 이 사람들조차 실은 자신들이 누리는 현실을 증강 현실쯤으로 치부하면서 ‘진짜 강남’이라는 또 다른 현실을 지향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모든 사실, 끊임없는 에스컬레이터화와 그 동력으로 작용하는 ‘교육 문제’라는 (돌이키기 힘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우리의 진짜 현실이 섬뜩하다.
정아은 / 잠실동 사람들 / 한겨레출판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