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여파가 가라 앉아 있어서 일까, 어둡고 탁한...
*2015년 1월 3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는 김숨이다. 살펴보니 2011년, 2012년, 그리고 2014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에 이름을 올렸다. 즐겨 읽는 작가는 아니어서 이렇게 간간히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이름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이번 수상작도 온전히 내 취향은 아니다. 식물의 뿌리들에 대한 작가의 관찰이 만들어낸 성과이기는 한데, 그 뿌리를 오브제로 삼는 미술가와 고모 할머니 사이에 위치한 내가 얼마나 효과적었는지 잘 모르겠다.
김숨 「뿌리 이야기」
“... 땅 위 지상에서 줄기가 가지를 치는 동안 땅 아래 지하에서는 원뿌리가 곁뿌리를 친다는 것을 그는 내게 귀띔해주었다. 잎이 풍성한 나무일수록 그 나무를 지탱해주는 것은 근원인 원뿌리가 아니라 곁뿌리라고...” (p.19) 식물, 그것도 그 식물의 꽃이나 잎이나 줄기가 아니라 그 뿌리는 소설의 소재로 얼마나 희귀하게 매혹적인 것이랴, 그러니까 옅은 식물성이 아니라 깊은 식물성이라고 해야 할까. 뿌리를 오브제로 삼아 작업을 하는 남자 친구, 그러한 남자 친구의 작업실을 들락거리는 나, 그런 나의 손을 꼭 잡은 적이 있는 나의 고모 할머니... 정신대 출신이라는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품에 안은 채 친척네를 떠돌던 고모 할머니가 나의 방에 기거하던 시절, 나의 손을 움켜 쥐었던 고모 할머니의 손에 대한 기억이 중편 분량의 소설 여기저기에 곁뿌리처럼 흩뿌려져 있다. 둔탁한 듯 섬세한 소재였고 문장들이었다.
김숨 「왼손잡이 여인」
어딘가 프랑스풍의 소설 같았다고 하면 괜한 소리일는지... 어느 날 갑작스레 자신의 왼손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 아내, 그러한 아내가 사라졌다고 여기는 왼손에 조금씩 집착하게 된 남편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심인성인 병증들이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 그저 희귀한 상황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겠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명백하게 존재하지 않는 왼손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성태 「소풍」
장모님과 아내와 어린 두 아이와 동행하는 어느 소풍의 이야기이다.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들 사이로 훅 치고 들어오는 위기가 잘 읽힌다. 소풍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수행하는 보물찾기 에피소드가 이런 위기를 적절히 고조시킨다.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치매라는 질병의 어떤 전초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조경란 「기도에 가까운」
미호의 주변에는 세 명의 노인이 있다. 새벽 시간 동안 미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허 고문,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미호의 노모, 그리고 미호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연변 할머니... 이미 나이가 들어 있는 자들이 바라다보고 있는 앞날은 그다지 밝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끔씩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마치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평재 「흙의 멜로디」
외딴 마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은 민화 한 토막이 지금 여기로 이어지고 있다. ‘식물성과 동물성의 교접’이라는 설정이 급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과 나무가 하나로 이어지는 모양이 초현실적인데, 그 초현실이 현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윤성희 「휴가」
휴가 기간 무작정 집에서 쉴 생각을 하는 나를 박과 박의 아내, 그리고 두 아이가 찾아온다. 그들의 여행에 억지로 동반을 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어정쩡한 나의 휴가 여행은 시작된다. 별다른 큰 이야기는 없다. 그저 일상에 소소히 박혀 있는 이야기들을 손톱 끝으로 하나씩 캐내는 것만 같다. 시시하다면 시시하고, 소중하자면 소중하달 수 있을...
손홍규 「배회」
아무래도 자살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박 부장의 죽음과 고등학생이던 나의 아들의 죽음, 그리고 나이든 고모의 상상 임신... 그리고 고모와 나의 아들을 연결시켜주었던 고모의 소설 혹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
한유주 「일곱 명의 동명이인들과 각자의 순간들」
“어느 일본인 작가의 소설에서 여름 옷감을 한 필 선물받았으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막연히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에서 본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가끔 이 말을 생각한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때로 한낱 감각적인 것에 불과하다...” (p.286) ‘한낱 감각적인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재주를 지니고 있는 작가가 바로 그 재주를 이용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만 같다. 파편화되어 있는 이야기들이 작가의 손에서 뽑아낸 실에 주욱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곶감이 되기를 기다리는 감들 같기도 한데, 아직은 떫다...
이장욱 「크리스마스캐럴」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어린 아내와 연인 사이였다는 한 어린 사내로부터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어린 사내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고, 노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잠시 주점에 들른 것 같았지만 여섯 시간이 지나 있고, 침대 위의 어린 아내는 늙어 있어 난감하다. 그리고 독자인 나는 찰스 디킨스의 스쿠루지 영감이 떠올라 대략 난감하고....
소설집 전체로는 나이든 이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여러 편 눈에 띈다. ‘소풍’과 ‘휴가’처럼 가벼운 일상의 여행이 등장하는 소설도 두 편... 다른 해에 비해 소설이 주는 무게감이나 재미가 덜하다. 어쨌든 작년 한 해 발표된 작품들 중에 가장 우수한 소설들이라고 뽑아 낸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하긴, 소설가도 사람일진대, 작년 한 해 우리들의 혼을 뽑아 버리기에 충분하였던 세월호 사건의 여파일 수도 있겠다.
김숨, 전성태, 조경란, 이평재, 윤성희, 손홍규, 한유주, 이장욱 / 뿌리이야기 : 2015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 350쪽 / 2015 (2015)
ps. “내가 우동을 한 가락 한 가락 건져 입속으로 가져가는 동안 핸드폰에는 음성 메시지가 한 통,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 찍혀 있었다. 나는 미끌미끌한 우동 가락을 당신은 씹지 않고 천천히 식도로 삼켰다. 세 통 다 여행사 대표번호였다.” (p.26) 수상작을 읽다가 이 부분이 마치 손거스러미처럼 내내 거슬려서 혼났다. 메시지가 한 통,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인데, 왜 그 다음 문장에서는 세 통 다 여행사 대표번호였다, 라고 한 것이지... 아 답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