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도나토 카리시 《심연 속의 나》

긴장을 풀어 놓는 순간 맞닥뜨리게 되는 참혹한...

  장르 소설을 향한 선입견이 있다.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지만 그 묘사들이 (특히나 배경 묘사가) 얼기설기하여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그야말로 선입견으로 만드는 작가들 또한 어엿하게 존재한다. 도나토 카리시 또한 그러한 이들 중 한 명이다. 작가는 인물 묘사나 심리 묘사, 장면 묘사나 상황 묘사 뿐만 아니라 배경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문장을 아끼지 않는다. 


  “닫혀 있는 창문은 감은 눈 같았고, 벽에 난 금은 눈물이 흘러내리다 마른 흔적 같았다. 더는 유쾌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간판 문구나 알록달록한 그림은 마치 나이 들고 상처 입은 거인 같은 분위기만 풍겼다. 나무판자로 막혀 있는 자동 회전문은 고장 난 회전목마 같았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소관목들은 마치 무덤에서 튀어나온 손가락뼈처럼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었다.” (pp.9~10)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버려진 호텔의 묘사에서도 이를 살필 수 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이 버려진 호텔에 들어선 소년의 심리는 이러한 배경 묘사를 통해 증폭된다. 이어지는 장면, 버려진 호텔의 오랜 시간 방치된 수영장에 대한 묘사는, 소년이 엄마의 강요에 의하여 그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묘사로 연결되는데, 독자들은 층층이 쌓여가는 묘사들을 통해 순식간에 소설로 빠져들게 된다.


  “여느 때처럼, 청소하는 남자는 민첩하고 조심스럽게 자기 업무에 열중했다. 할 일을 다 마친 뒤에는 잠시나마 호수를 끼고 있는 알프스산맥의 풍경을 감상했다. 살짝 포근한 날이었지만, 그는 더위를 느꼈다. 그래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그런데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알록달록한 조각 하나를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뭘 떨어뜨렸는지 보려고 허리를 숙였다.

  ‘선택받은 사람’의 쓰레기에서 찾아냈던 빨간 매니큐어 칠한 손톱 조각이었다. 성유물.” (pp.55~56)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 과거의 소년은 이제 ‘청소하는 남자’가 되어 있다. 가정 학대의 피해자였던 아이는 ‘청소하는 남자’가 되어 ‘선택받은 사람’ 그러니까 자신을 조정하는 내부의 사람(어쩌면 심연 속의 나)이 선택한 여자를 죽인다. ‘청소하는 남자’를 조정하는 것은 미키이고, 미키는 남자의 엄마인 베라의 남자 친구였으며, 어린 시절 ‘청소하는 남자’를 학대한 장본인이다. (물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독자들은 보다 잔혹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냥하는 여자는 폭력이 사람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나태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변화에 맞선다는 두려움이 폭력으로 인한 두려움보다 크게 느껴질 때가 의외로 많다. 적잖은 수의 피해 여성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가해자들이 얌전해지기를 헛되이 기다리곤 한다. 그런 날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로.” (p.106)


  ‘청소하는 남자’의 맞은 편에는 ‘사냥하는 여자’가 있다. ‘사냥하는 여자’는 학대받는 여자를 구출하는 일을 한다. ‘사냥하는 여자’의 과거에는 남자 친구에게 살해당한 소녀가 있으며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호수에서 건져 올려진 여인의 팔 한쪽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그 팔 한쪽으로 ‘사냥하는 여자’는 ‘청소하는 남자’와 연결되고, 마침 ‘청소하는 남자’는 한 소녀를 구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던 익명의 장치를 헐겁게 만들고 만다.


  “살인자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 질서형과 무질서형. 질서형은 모든 걸 사전에 철저히 계획해. 사회에 동화도 잘돼서 번듯한 직장도 가지고 있고, 세금도 내고 법도 잘 알아. 아주 사악한 부류들인데 자신들만의 확실한 목표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신중하고 철저해서 웬만해서는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단서 같은 걸 흘리는 일도 없지······. 반대로 무질서형은 충동에 이끌리는 부류들이야. 사전에 특정 피해자를 선정하기보다, 그냥 그때그때 대상을 고르는 거지. 이들은 주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거나, 가족이나 친구도 없는 경우가 많아. 감정이라는 게 결여된 부류라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거야. 이들을 식별해내기 어려운 이유는, 실수를 범하기는 하지만 그 실수 자체가 워낙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pp.356~357)


  범죄 소설의 장르에 속해 있지만 《심연 속의 나》는 범인을 잡는 데에 골몰하지는 않는다. 범인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으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흥미를 유발하지도 않는다. 대신 범인과 추격자의 형성 과정을 살피는 데에 주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들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만드는 반전의 묘미를 준비해 놓았다. 모든 게 마무리되고 긴장을 풀어 놓는 순간 그 반전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도나토 카리시 Donato Carrisi / 이승재 역 / 심연 속의 나 (Io Sono L’abisso) / 검은숲 / 426쪽 / 2023 (2020)

매거진의 이전글 옥타비아 버틀러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