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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도나토 카리시 《미로 속 남자》

사건 해결의 안도감에 빠져드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제가 갇혀 있는 곳은 끝이 없어요. 시작도 없고.” (p.57)


  사만다 안드레티는 자신이 있었던 장소를 그린 박사에게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학교에 등교하다 납치되었던 중학생 사만다 안드레티가 다시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소녀의 납치는 불길하기 그지 없지만 귀환이라는 결말은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이리라 여겨지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함정이 있다. 귀환과 납치 사이에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립 탐정의 첫 번째 철칙은 눈에 띄지 않는 외모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차림새가 중요한 이유는 남들의 시선이 땀내와 담배 냄새에 찌든 그의 누더기 같은 옷차림과 덥수룩하고 기다란 턱수염에 집중돼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외모는 일종의 갑옷과도 같다. 그래서 타인들로 하여금 그의 겉모습에 집중하게 만들어야 했다. 처지가 딱해 보이는 남자를 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십중팔구 경계심을 풀기 마련이니까.” (p.116)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납치와 귀환 사이의 시간을 파헤치기 위하여 브루노 젠코라는 사립 탐정이 등장한다. 그는 오래전 부모에게 의뢰를 받아 사만다를 뒤쫓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때 포기하였고, 이제 사만다가 다시 등장하면서 묻어 두었던 포기의 기억을 뒤집을 작정을 한다. 경찰로부터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도 브루노는 서서히 사만다를 납치하였던 범인을 향하여 접근하기 시작한다.


  “... 그린 박사는 놈을 ‘가학적 비르투오소’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들의 분류 기준에 따르면 ‘자위적’ 사이코패스에 해당하는 놈입니다... 다른 연쇄살인범과 달리 자위적 사이코패스에 해당하는 놈들은 살인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놈들에게 죽음은 전적으로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놈들의 목적은 피해자를 비루하고 미약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자위적 사오크패스가 만든 감옥에 갇힌 피해자들은 혹독한 테스트를 거쳐야 합니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그런 시험. 어쩔 수 없이 몹쓸 짓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놈들은 그런 식으로 자위하며 자신이 괴물임에 만족하는 겁니다.” (pp.177~178)


  소설은 이제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범인을 탐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풀려난 사만다가 병원에서 그린 박사와 함께 자신이 갇혀 있던 공간을 기억하는데 힘을 쏟는 동안 브루노는 범인의 실체를 밝히느라 고군분투하게 된다. 그러나 모두를 헷갈리게 하였던 범인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게 되는 순간 브루노는 숨을 거두게 된다. 주인공인 서술자로 역할을 한 브루노의 죽음 이후에도 그럼에도 소설은 계속된다.


  “로빈 설리반이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는 이미 낙후된 상태였다. 그러니 사만타 안드레타가 자라던 시절은 상황이 더더욱 좋지 않았다. 딸이 실종된 후 아버지는 다른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브루노는 사만타와 그 납치범이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포식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사냥터로 삼는다, 그게 바로 자연의 법칙이었다.” (p.247)


  브루노의 죽음과 뒤바꾸면서 밝혀진 범인은 결국 베리쉬 수사관에게 붙잡힌다. 베리쉬 수사관은 밀라 바스케스 수사관과 함께 작가의 전작인 《속삭이는 자》 그리고 《이름 없는 자》의 사건을 해결한 전력이 있다. 그렇게 도나토 카리시의 ‘속삭이는 자’ 시리즈가 그 마지막 권인 《미로 속 남자》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자리에 함께 해야 하는 밀라 바스케스 형사는?


  “감금 생활을 했던 72시간 동안 두려움은 소년의 머릿속에 심연처럼 깊은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로빈은 성인이 되면서 그 미지의 구멍 속에 남들에게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욕망, 어둡고 난해한 충동, 그리고 폭력의 씨앗을 쑤셔 담고 뿌려왔다. 하지만 열 살의 로빈은 두려움이 만들어놓은 그 구멍이 무언가를 품고 부화시킬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또 다른 인격을 가진 존재를... 로빈 설리반 안에 또 다른 ‘내’가 생겼던 것이다. 로빈은 집에 돌아온 자신을 바라보던 부모님의 눈빛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사악한 한 마리 토끼였다...” (pp.332~333)


  소설의 마지막은 이 지점에서 요령 부득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로에 갇혀 있었고 탈출하여 혹은 탈출 당하여 세상으로 나왔다가 곧바로 그린 박사의 병실에 머물고 있는 사만다 안드레티는 어느 순간 서서히 밀라 바스케스 형사라는 인물로 변한다고 해야 할까. 소설을 모두 읽고 사건 해결 뒤의 안도감에 빠져야 하는 순간, 오히려 뫼비우스의 띠 혹은 장자의 나비를 떠올리며 복잡미묘한 심경이 되어버리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도나토 카리시 범죄 소설의 시그니처가 아닐까.



도나토 카리시 Donato Carrisi / 이승재 역 / 미로 속 남자 (L’uomo Del Labirinto) / 검은숲 / 20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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