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와 '자야 여사'를 넘어 풀 타임 백석으로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
시인 백석을 생각할 때 가장 앞 자리에 떠올려 볼 수 있는 싯구이다. 엊그제 누군가의 트윗 타임라인에서도 이 싯구에 대한 구절을 하나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이들이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운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그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작정할 때, 백석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눈이 내린다고 적고 있다는 사실을 타임라인의 구절은 한 번 더 지적하고 있었다.
“...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p.175)
그 타임라인의 주인공이 안도현의 《백석 평전》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안도현 또한 위와 같이 백석의 싯구를 위와 같이 평하고 있다. 백석 이후의 많은 시들은 결코 함부로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함께 논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푸념을 늘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함께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야 여사이다.
“자야는 산징으로 같이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자야를 뒤로 하고 백석은 일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야에게서 멀어져갔다.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마지막이었다. 1939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p.209)
길지 않은 시간의 만남 이후 평생 동안 백석을 그리며 살았던, 그러한 자신의 사랑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던 자야 여사의 청진동 시절... 백석을 피하여 숨어 있던 자야를 몇 달 만에 찾아내어 하룻밤을 보낸 후 백석은 봉투에 담아 시 한 편을 건네는데 바로 그것이 <나와 나탸사와 흰 당나귀>였던 것이고, 우리는 백석과 함께 자야 여사를 떠올리게 되고, 그의 시의 ‘나’와 ‘나타샤’를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된다.
『...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이상 들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을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직수입하였다. 그들은 도시문명에 경도되었고, 회화적 이미지를 자주 구사했으며, 때로 상징적 수법을 과용하면서 근대성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몸은 없고 관념만 앙상한 시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백석은 달랐다. “백석은 시어를 현실생활과 거리가 있는 생경한 ‘지식의 언어’가 아닌 생활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명료한 일상의 어휘로 운용하였다.” (최정례, 『백석 시어의 힘』, 서정시학, 2008). 그리하여 몸과 관념이 일체화된 시를 써낼 수 있었다.“ (p.100)』
물론 내가 근접하여 떠올린 것이 하나의 싯귀와 자야 여사였을 뿐, 시인 안도현이 쓴 평전은 백석의 전생애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 오산학교 시절로부터 시작하여 일본 유학기, 첫 시집의 발간과 영어 교사 시절, 운명과 같은 자야와의 만남, 조선일보를 비롯한 출판사에서의 생활과 만주에서의 생활, 그리고 해방 이후 북에서의 나머지 삶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또한 일대기의 중간중간 백석의 시와 산문 등을 꽤 많은 분량 삽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딘지 아쉽다. 츠바이크의 감각적이면서도 (평전의 대상 인물에 대하여) 밀착형인 평전에 익숙해져서인지 어쩐지 안도현의 평전은 싱겁게 느껴지고 말았다. 그가 시인으로 살았던 시절, 해방 전과 해방, 해방 후라는 격동의 시절이 시인 백석에게 가하였을 고뇌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그것이 커다란 감응이 되어 살아나고 있지는 못하다. 시인 백석에 대한 개괄로서의 기능만이 짙어 보인다.
안도현 / 백석 평전 (白石 評傳) / 다산책방 / 455쪽 / 2014 (2014)
ps. 백석의 생애를 개괄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면...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출생, 1918년 오산소학교 입학, 1924년 오산학교 입학, 1929년 오산고보 졸업, 1930년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 1934년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 1936년 33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 1937년 부모의 강요로 결혼, 1938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비롯해 22편의 시를 발표, 1939년 서울 청진동에서 자야와 동거하며 충북 진천에서 두 번째 결혼, 1940년 만주의 산징에서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말단 관리로 일하다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만에 그만둠, 1942년 만주의 안동세관에 근무하며 화가 문학수의 동생 문경옥과 1년 남짓 신혼살림을 차렸으나 곧 이혼, 1945년 만주 일대에 은거하다 해방 후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와 이해 말 신부 리윤희와 평양에서 결혼,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고 러시아 문학작품 번역에 매진, 1948년 10월 『학풍』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했으며 이것이 남쪽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가 됨, 1953년 전국작가예술가대회 이후 외국문학 분과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번역에 집중, 1956년 1월 8년만에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지게게네 네 형제」를 발표, 1957년 4월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출간, 1958년 시 「제 3 인공위성」을 발표했고 9월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문학 활동 대부분이 중단, 1959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로 내려가라는 현지 지도 명령에 따라 현지로 내려가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등을 발표, 1960년 1월 평양의 <문학신문> 주최 ‘현지 파견 작가 좌담회’에 참석, 1962년 4월 시 「조국의 바다여」를 5월에 동시 「나루터」를 발표하였고 10월 이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일절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됨, 1996년 85세의 나이로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