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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해마다 이맘때면 소환되는 오래전 나를 거두어 주었던 어떤 공간을 향한..

by 우주에부는바람

해마다 명절이 되면 단촐한 가족들이 부천의 사촌형네로 모인다. 그리고 그 방문길에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거처이자 내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며 어린 시절 내 마음의 고향 같았던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의 할머니댁을 떠올린다. 김제역이나 이리역(거대한 화약 폭발 사고 이후 익산으로 지명이 바뀐)까지 기차로 내려간 후 부안까지 시외버스로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돈계리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사십여 분을 덜컹거리며 달려, 멀미 가시지 않은 허연 얼굴로 다시 삼사십 분을 걸어야 당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야 뉘엿거리며 늘어난 그림자를 겨우 초가집 토방에 걸쳐 놓을 수 있었던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은 아빠가 혼자 빗속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근데 그 모습이 저는 왠지 쓸쓸해 보이던데, 이상하죠? ... 이상할 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던 공간이,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흔적 없이 사라질 거라는 어쩔 수 없는 예감 때문이란다, 얘야.” (pp.74~75)


우리가 도착하면 할머니는 곧바로 뒷곁의 장독대에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퍼올린 거대한 무를 하나 건넸다. 그 무를 시원한 국물과 함께 몇 번 씹어 삼키고 나면 거짓말처럼 멀미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차례 심호흡을 하면 그제야 할머니집 작은 마당 앞으로 펼쳐진 논과 그 너머의 나지막한 산이 눈에 들어왔고, 집 뒤의 작은 대나무 밭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으로 긴 하루의 여독을 씻어 낼 수 있었다.


‘사라진 공간들’과 그 공간들을 떠올림으로써 ‘되살아나는 꿈들’에 대한 윤대녕의 이야기를 읽자마자 나는 곧바로 오래전 할머니 댁을 떠올렸다. 당시의 부모님은 방학 때면 우리를 (애초에는 나 혼자였으나 나중에는 어느 정도 큰 동생들까지도) 그곳에 떨궈 놓고 사라지셨다. 손주들과 실컷 마주하지 못하는 할머니에 대한 부모님의 배려였을 수도 있고, 그렇게 잠깐이나마 숨통을 트이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혹은 우리는 서운한 감정과 즐거운 마음을 지그재그로 느끼며 그곳에서 방학을 보내고는 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방학을 그곳에서 보냈다. 쓸데없는 유혹들과 엄격하게 단절된 채 공부에 전념하라는 부모님의 배려가 분명해서 동생들도 동행하지 않았다. 공부하러 내려온 손주를 위해 할머니는 매일 새벽 가까운 항구에 나가 꽃게를 사오셨고, 한 달 내내 꽃게탕을 끓여주셨다. 나는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동네 친구들을 잔뜩 사귀었고, 밤이면 동네 모종에서 그들과 어울려 놀았고, 수박 서리며 복숭아 서리를 푸대 자루 단위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 나는 가끔 이런 사념에 젖곤 한다. 또 다른 장소와 공간들, 비록 그곳들이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것을 알지만 오직 현존 속에서만 거머쥘 수 있는 삶에 뜨겁게 복무하기 위해 또다시 떠나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그곳이 어디가 됐든 다시 혼자가 되어서 말이다.” (p.85)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이상이 생긴 할머니는 시골의 거처를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오셔야 했다. 우리집에서 이 년여 기간 동안 병치레를 하시던 할머니는 1990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는 고3 여름 방학을 마지막으로 할머니댁을 다시는 방문하지 못했다. 어느 해 먼발치에서 그곳을 한 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그곳은 내게 한 점 기억으로 남겨진 고향집이 되었다. 윤대녕의 산문집에는 ‘고향집’ 이외에도 늙은 그녀(우리들의 엄마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이 되기도 하니까), 휴게소 공항 역 터미널, 지하 카페, 노래방, 바다, 유랑의 거처, 술집들, 골목길들, 사원들, 역전 다방, 경기장, 음악당, 여관들, 부엌, 목욕탕, 영화관, 자동차, 도서관, 우체국, 공중전화 부스, 병원, 광장이 ‘사라진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꿈을 되살리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근데 그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어떤 꿈을 꾸었더라...



윤대녕 /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 현대문학 / 254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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