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하기 이전 민낯에 대한 관심까지를 포함한 도시, 서울, 용산 관찰기.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문학동네의 임프린트 난다에서 ‘걸어본다’ 라는 제목으로 기획한, 작가들의 동네 탐방기 중 그 첫 번째 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가벼운 유용함의 갑옷을 - 가벼움과 갑옷이라는 이율배반의 표현 방식을 용서하시라, 이웃 동네를 산책하는 듯한 가벼움과 그 와중에 맞닥뜨리는 시간의 속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 두른 시리즈물의 첫 번째 주자는 평론가 이광호이다. (책의 뒷날개를 살피니 이후에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강병융의 류블라나, 황현산의 비금도, 이홍섭의 강릉, 장석남의 덕적도, 김유지의 자양동, 최갑수의 파주, 김경의 바르셀로나 등이 추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시간은 절대 머뭇거리지 않으며 장소는 침묵하고 망각은 사람의 일이다. 그들의 기억이거나, 너의 기억이거나, 나의 기억이거나, 혹은 우리의 기억이거나, 살아 있다는 것은 기억이 남아 있거나 혹은 기억이 사라져간다는 것. 기억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미지의 가능성이다.” (p.15)
아마도 이 기획물은 그러니까 어떤 공간을 향한 기록물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애증의 기록이 될는지 그저 객관적인 관찰의 기록이 될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의 경우에는 후자에 가까운데 애초에 서울 그것도 용산에 딱히 연고를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에 실린 내용들은 별다른 사적인 투과를 거치지 않는 대신 보다 객관적인 심미안을 요령껏 활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탓에 꽤 밋밋해질 수도 있는 글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물론 이광호가 감상적인 글쓰기가 가능한 평론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 장소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은 기억에 대한 투쟁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기억을 다시 세우는 일이지만 억압된 기억은 긴 우회를 거쳐 언젠가 유령의 얼굴로 귀환한다.” (p.32)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용산 전역의 구체적인 공간들은 다음과 같다. 삼각지, 효창공원, 청파동, 용산전자상가, 용산역, 서부이촌동, 삼각지 화랑거리, 전쟁기념관, 녹사평역, 해방촌, 이태원, 후커 힐, 남산, 한남동, 동부이촌동, 남일당 터...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곳도 있고 그렇지않은 곳도 있으며, 과거의 영화가 깃든 곳도 있고 최근 핫한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곳도 있는 용산의 구석구석을 아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태원의 다양성은 미국식 문화뿐만 아니라 아랍, 인도, 아프리카의 문화들이 동거하는 데 있다. 이태원의 문화적 다양성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은 이식된 미국 문화를 넘어서 제삼세계의 다른 문화가 유입되면서부터이다. 이곳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외국인들의 국적은 이제 미국을 넘어서 나이지리아, 몽골,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곳의 사람들이 이태원에 거주하는 삶의 방식은 미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들은 이 도시의 해방군으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새로운 지배자도 아니다. 미군과 미국인들의 소비를 위해 존재하던 공간은 다국적 활력이 들끓는 이질적인 공간으로 변모해간다. 히잡을 쓴 여인이 교회 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곳, 보수적인 종교인 이슬람 사원 주변에 게이 바와 트랜스젠더 바가 밀집되어 있는 곳, 이런 공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이름으로부터도 미끄러져 달아나며, 어떤 순결과 지배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거리.” (pp.110 ~ 111)
물론 우리에게 용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곳의 오랜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미8군 기지와 그 주변에 그들을 기반으로 형성된 이태원이라는 공간일 것이다. 물론 그 이전 미군이 들어오기 전 식민 시절에는 일제 군대가 자리잡은 것이 또 이태원이었으니 그 오욕의 역사는 무참히도 오래 되었다. 저자는 이처럼 용산의 과거에 깃든 기억까지를 끄집어내어 현재의 용산을 주목하는데 정성을 다한다.
“오랫동안 이곳에서는 ‘식민’의 장면들이 반복되었다. 모욕과 망각의 시간과 폭력적인 개발의 시간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서로를 단절시키는 기이한 공간. 여기는 모더니티의 지옥이며 모더니티의 심연이고, 여러 수준의 모더니티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장소, 모더니티의 폐허이다. 용산이 여러 겹 시간의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지금 벌어지는 것은 그 단층 사이이에서 태어난 지진의 사태이다...” (p.150)
이 책은 하나의 공간에 대한 에세이일 수도 있지만 일종의 여행서로 활용되어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책을 읽고 나면 누구든 용산 여기저기를 문득 걸어보고 싶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화장된 얼굴은 마냥 화려하지만 그 민낯과 마주치는 일은 흔치 않다. 어쩌면 이 책은 그 민낯에 대한 작가의 의뭉스러운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민낯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게 될 수도 있지만 아예 모르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이광호 /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난다 (문학동네 임프린트) / 160쪽 / 2014 (2014)
ps1. 책을 읽으면서 책에서 거론되고 있는 동네가 어디쯤인지를 머리로만 생각하느라 힘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니 책에 덧씌워진 표지를 떼어내서 펼치면 그 반대편에 용산 전체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제길...
ps2. 용산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몇 개 있다. 지금은 필리핀으로 떠난 고등학교 동창이 카추샤로 미8군에서 헌병을 했다. 그를 따라 몇 번 미8군 영내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장에 갔는데 물 나오는 샤워 꼭지가 저어어기 높은 곳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 물론 한참 샤워하는 중간에 덩치 큰 흑인 병사가 들어오더니 바로 내 옆에 자리를 잡고는 나를 향해 씨익 웃었던 것에도 깜짝... 대학 문학회 선배 중에 술이 취하면 간혹 무작정 걷는 것을 주사처럼 행하는 형이 있었다. 어느 날 나와 그 당시의 여자 친구 그리고 선배가 함께 그렇게 술 취한 채 서울을 종단하며 걷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홍대에서 걷기 시작하고 몇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 친구가 화장실을 찾았고 그때 그 선배는 그녀를 데리고 해밀턴 호텔의 로비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녀가 들어가 본 최초의 호텔이 아니었을까... 이외에도 이촌역 근처에 있던 무슨무슨 캐빈이던가 하는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선배를 몇 번 찾아갔던가 하는 기억, 한강 둔치 개발이 완료되기 전이던 그때 이촌역이던가에서 곧바로 한강으로 통하는 샛길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하는 기억, 그리고 오래전 식목일 전날 함께 했던 그녀와 함께 했던 용산 지역 한강변 공원에서의 놀이터 산책에 대한 기억들 몇 개가 더 떠오른다.
ps3. 용산과 관련한 얘기를 요즈음 자주 듣는다. 얼마전 결혼한 후배는 용산에 신혼집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까페 여름의 주인인 후배 그리고 단골 손님은 해방촌에서 만나 공부를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