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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욱 《비성년열전 非成年列傳》

이 땅의 수많은 '바틀바잉들'과 '바틀바이드들'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by 우주에부는바람

『어떤 요구에 대해서건 질문에 대해서건 바틀비가 집요하게 반복하는 대답은 “안 그러고 싶다”이다. 멜빌의 영어 원문으로는 “I would prefer not to” 인데, 문법상으로 틀린 건 없어도 이게 좀 이상한 말이란다. 일반적으로는 “I would not prefer to” 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들뢰즈, 네그리, 지젝, 주판치치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은 이 문장의 기이한 부정형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 않다’ 가 아닌, ‘않음을 하다’로 만드는 not의 위치. 부정과 긍정으로 영토화되지 않는 제3지대. 이 전제 위에서 바틀비로부터 어떤 근원적 가능성을 찾으려는 비평적 작업들이 전개된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그 의미의 주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틀비의 말이 하나의 철학적 성감대가 아닐까 싶을 만큼 해석의 쾌락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p.9)


이 산문집은 그러니까, 어쩌면 저자 신해욱이 바틀비의 말을 ‘철학적 성감대’로 느끼는 많은 철학자들처럼 자신 또한 소설, 영화, 만화와 같은 세계 속의 혹은 그 바깥의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하여 어떤 ‘쾌락 같은 것’을 느끼고자 하는 의도로 충만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그 쾌락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바로 아래의 문장 때문이기도 한데, 내 삶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내게 속살거리는 비성년의 목소리에 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으니 말이다.


“... 움직여서 인간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게 된 이들을 성년이라 부른다.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으되 이제 그렇게 될 이들을 미성년이라 부른다. ‘이미’ 그렇게 되지 않는 이들은, 그러니 비성년이라 부르기로 하자. 미성년은 대기 중이고 비성년은 열외에 있다.” (p.20)


사실 비성년은 작가에 의하면 바틀바잉 The bartlebying 과 바틀바이드 The bartlebied 들을 의미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에서 솟아난 이 단어들은 물론 작가에 의한 조어이다. 그러니까 이 산문집의 작가 신해욱은 원래 시인이다.) 작가는 완성된 부정형인 바틀비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바틀비로 진행중인 병을 앓는 이들을 ‘바틀바잉’으로,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이 병을 앓는 이들을 ‘바틀바이드’라고 부른다. 이 산문집은 작가에게 포착된 바틀바잉들과 바틀바이드들의 이야기이고,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두더지>의 스미다, J.D.셀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 신재인의 영화 <신성일의 행방불명>의 신성일,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 《렛 미 인》의 호칸 뱅손, 조하형의 소설 《조립식 보리수나무》의 김희영과 김영희 혹은 김희영희, 그냥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스즈키 유미코의 만화 《미녀는 못말려》의 안나, 자움 콜렛 세라의 영화 <오펀>의 에스더 콜먼,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신부 (신해욱에 의해서만 이렇게 명명되는) J, 빈프린트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의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정신병 환자로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을 남긴 다니엘 파울 슈레버, 드골 공항에서 ‘아무도 안’인 존재로 11년을 살았던 사내 알프레드 메흐란...


어떤 작품들이 아니라 그 작품들 속의 인간 혹은 그저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한 산문집이어서 더욱 다가가기에 좋다. 어떠한 형태의 비평이나 비판이 아니라 일종의 탐구로 읽히기 때문이다. 약간 투박한 듯하지만 결벽스럽지 않아서 부담이 덜하고, 월간지에 연재된 (산문집의 글들은 《현대문학》에 2010년 3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연재한 것들이다) 글들이지만 스스로 정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니 개별적인 글들을 읽고 나서도 산만하다 여겨지지 않는 것 또한 이 산문집의 큰 장점이다.



신해욱 / 비성년열전 非成年列傳 / 현대문학 / 308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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