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하게 덜컥거리는 캐릭터들과 함께 한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존재
하루키의 캐릭터 구축 능력은 여전히 탁월하다. 그렇게 잘 구축된 캐릭터들로 이야기를 꾸려 나가니 별것 아닌 이야기들조차 번들번들 윤기가 흐르게 된다. 캐릭터에 공을 들이다 이야기가 허술해지거나 이야기에 공을 들이다 캐릭터가 희미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이 능숙한 작가에게는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버를 하는 듯 오버를 하지 않는 듯 어떤 경계 위에서, 캐릭터와 이야기를 끝에 매단 긴 막대기로 슬쩍슬쩍 균형을 유지하며, 허공에 걸친 소설이라는 줄 너머로 세상을 흘낏흘낏 바라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전히 잘도 걷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
“... 이십 년 가까운 결혼생활 동안 그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섹스를 했고, 적어도 가후쿠의 관점에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내가 자궁암에 걸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린 뒤, 그는 몇몇 여자들을 만났고 자연스레 잠자리도 함께했다.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에서 느낀 친밀한 기쁨을 맛볼 수는 없었다. 전에 경험한 일을 다시 되풀이하는 듯한 마일드한 기시감이 있었을 뿐.” (p.29) 배우인 가후쿠 씨는 아내가 죽은 이후에도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 친구는 별로 없지만 죽기 전 아내의 밀회 상대였던 다카쓰키와 친구가 될 뻔한 적은 있다. 그는 여전히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지만 동시에 왜 아내는 자신을 속이며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제 가후쿠 씨는 자신의 기사 노릇을 하게 된 젊은 처자인 미사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낸다.
「예스터데이」
『“알아. 그건 나도 잘 알지.” 기타루는 말했다. “그런데 알기만 해서야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야, 네 말에 네가 딴죽 좀 걸지 마.”』(p,102)
소설 속 기타루와 나의 대화 내용이다. 그러니까 하루키가 만들어내는 특이한 캐릭터들의 하나로 기타루는 손색이 없다. 자기가 말하고 그런 자기의 말에 딴죽을 거는 삼수생인 기타루, 우리로 치면 서울 태생이면서 일부러 방학 때마다 제주도에 들러 제주도 사투리를 열심히 익혀 이제는 제주도 사람만큼이나 그 억양과 단어까지 완벽히 사투리를 구사할 수 있는 기타루,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연인인 에리카가 대학생인 점을 고려하여 자신의 동료 알바생에게 자기 대신 만날 것을 권하는 기타루...
「독립기관」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거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옂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p.166) 쉰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유복한 성형 병원 원장으로 살면서 한 번에 두 세 명 혹은 그 이상의 여자와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그래서 그는 주로 유부녀와 만난다) 만남을 가지며 살아가던 도카이... 그런 도카이가 드디어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꽤나 비틀려 있다. 여자는 도카이를 남겨둔 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도카이를 속여 돈을 뜯어낸 다음 또 다른 연하남에게 가버린다. 그리고 이제 도카이는 생존을 위한 모든 행동을 그만두고 칩거에 들어간다.
「셰에라자드」
“...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들의 젖은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몸의 미묘한 떨림을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하바라에게 무엇보다 힘겨운 것은, 성행위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녀들과 친밀한 시간을 공유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마라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p.214)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으나 유부녀인 셰에라자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찬거리를 사와 하바라의 냉장고를 채워주고 섹스를 한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물론 셰에라자드가 본명은 아니고 하바라에게 매번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하바라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 천일야화와 같은 이야기 중에 두 가지, 자신은 전생에 칠성장어였다는 이야기와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애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물건을 훔쳐냈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나 할까... 물론 두 이야기 모두 재미있다, 게다가 그 남자애와의 이야기는 뒷 부분이 있다는 암시만 남기고는 소설을 끝낸다. 못됐다...
「기노」
아내의 불륜을 직접 목격한 후 기노는 그 길로 집을 나오고, 시골로 가게 된 이모의 집을 불하받아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노’라는 술집을 열게 된다. 그리고 가미타라는 미스터리한 사내의 도움으로 진상 손님들과 부딪칠 위기를 벗어나고, 그만큼이나 자주 동행과 술집에 들르던 한 여자와 느닷 없는 그리고 격렬한 섹스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술집 주변에 뱀이 등장하고, 가미타의 조언에 따라 ‘기노’의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갑작스레 도시괴담으로 변모하는 소설이 뜬금없다.
「사랑하는 잠자」
다른 여섯 편과 달리 애초의 소설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그러니까 한국판에만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벌레가 된 잠자가 아니라 다시 사람이 된 잠자, 라고나 할까... 그러고보니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도 썼는데, 카프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자 없는 남자들」
‘엠’이라고 임시로 부르기로 한 여자, 그 여자의 죽음을 알리는 한밤의 전화... 엠은 내가 지금까지 사귄 여자들 중에서 자살을 한 (벌써) 세 번째 사람이다. “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고독한 남자라고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는 역시 그녀의 남편일 것이다. 나는 그 자리를 그를 위해 남겨둔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p.326) 그리고 나는 ‘여자 없는 남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소설을 읽고 그 느낌을 정리할 때 느끼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 쯤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읽는 동안에는 조금 지루하고 뭔 말인가 싶었지만 정리를 하며 곰곰이 떠올리는 중에 아, 탄식을 지어내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고는 한다. 반면 어떤 소설은 읽을 때는 흥에 겹고 기분 좋은 뉘앙스까지 고스란히 전달받았음에도 정리를 하다보면 딱히 내게 남겨진 침전물이 애매하기만 하여 갸우뚱거리고는 한다. 어쩌면 이번 하루키의 소설집은 후자에 속한다고 해야 할까. 뭐 그렇다고 해서 전자 쪽은 나쁘고 후자 쪽은 좋다, 라는 말은 아니고...
무라카미 하루키 / 양윤옥 역 / 여자 없는 남자들 (女のいない男たち) / 문학동네 / 337쪽 / 2014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