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추락》

편리하지만 안이할 수 있는 이분법적인 이해를 속속들이 차단당하고 마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숨가쁨을 느꼈다. 소설이 제공하는 이슈들은 묵직하지만 그것들을 떠안으며 혹은 떠안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시인 바이런과 여인 테레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은, 음, 난해하기는 하지만...) 이혼한 중년의 교수와 그가 만나는 창녀 그리고 그가 꼬시게 되는 어린 여대생이 나오는 소설의 초반부만을 놓고 보자면 홍상수의 영화나 박범신의 《은교》가 떠오르지만 이 작은 물줄기는 커다란 본류와 합류하기 위한 시작점일 뿐이다.


“... 우리는 감각적 경험에서 유리된 채 순수한 관념의 영역 속에서 일상적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리얼리티의 무차별한 살육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상상력을 순수하게 유지하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양쪽이 공존하는 길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p.37)


소설의 주인공인 중년의 대학 교수 데이비드 루리는 에스코트 업체를 통해 제공받던 창녀와의 일상이 흐트러진 후 자신의 수업을 듣는 여대생 멜라니와 적절치 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관계는 곧 대학 당국에 알려지게 되고 루리는 위원회에 불려가 자신을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루리는 자신을 변명하는 대신 그저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는 대신 서둘러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대도시인 케이프타운을 떠나 시골에 정착해 있는 자신의 딸 루시에게로 간다.


“개들과 총, 오븐 속의 빵과 흙 속의 농작물. 도시 지식층인 그와 그녀의 어머니가 시대에 역행하는 억세고 젊은 개척자를 낳다니 신기하다. 하지만 그녀를 낳은 것은 어쩌면 그들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역사가 더 큰 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p.93)


이쯤에서 소설은 그 배경이 되는 나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라는 것을 실감하도록 만든다. 1990년까지 인종차별정책인 아라프트헤이트가 유지되었던 나라, 1994년 흑백 연합 정부가 들어서면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단시간에 그간의 인종차별정책을 인종화합정책으로 얼버무린 나라, 그러나 여전히 그간의 인종차별정책이 낳은 기형적인 의식이 존재하는 나라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체가 주인공일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값을 톡톡히 치르셨군요. 어쩌면 그녀는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들은 놀랍게도 용서를 잘 하거든요.” (p.105)


자신이 저지른 행위 그리고 그로 인해 결과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부터 도피한 아버지와 딸은 얼마간 잘 지내는 것 같다. 딸 루시는 그곳에서 땅과 집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 하고, 아버지 루리 또한 자신이 꿈꿔왔던 바이런과 테레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음악극을 만들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녀의 꿈은 어느 날 3인조 강도가 들이닥치면서 크게 요동을 치게 된다.


“... 제가 왜 경찰에 그 문제를 밝히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 하시죠? ... 그 이유는 제게 일어난 일은 순전히 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다른 때, 다른 곳에서는 공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곳, 이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제 일이에요. 전적으로 제 일이에요... 이곳이 남아프리카이기 때문에 그래요.” (p.169)


루리는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지만 딸인 루시는 자신에 대한 강간 사건을 모른 척 하거나 축소하려고 한다. 여기에 그간 루시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 도움을 주는 듯 하였던 이웃집의 흑인 남성인 페트루스가 이 사건의 범인들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루리가 도시에서 벌였던 일종의 성적인 가해 행위 또한 소설을 읽자면 루시에게 벌어진 사건과 개별적으로 읽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 개인적인 일이 었어요.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그것 때문에 더 간담이 서늘해지더군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p.235)

“그것은 역사가 그들을 통해서 말을 하기 때문에 그래. 죄악의 역사가 말이다. 도움이 된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라. 그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았을 게다.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 (p.235)


소설 속에서 루시는 결국 남아공의 과거가 만들어낸 피해자인 듯 하지만 그보다는 그저 과거로부터 비롯된 남아공의 현재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과거의 한 켠에는 루시의 아버지인 루리가 있고 다른 한 켠에는 루시의 옆집에서 그녀를 컨트롤하려고 하는 흑인 남성 페트루스가 있다. 그렇게 한쪽은 가해자였다가 이제는 피해자가 되어버린, 다른 한쪽은 피해자였지만 이제 가해자가 되어버린 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더욱 절망적이다. 과거의 유물인 이 두 남성 중 어느 한쪽도 루시를 평화롭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이제 아버지 루리에게는 루시를 보호할만한 힘이 없고, 이웃인 페트루스는 루시를 온전한 방식으로 보호하려는 의지가 없다.


“그래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굴욕적이죠.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예요. 어쩌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배워야 할 거예요.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워야죠. 아무 것도 없이. 어떤 것밖에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이. 카드도 없고, 무기도 없고, 재산도 없고, 권리도 없고, 위엄도 없고... 개처럼... 그래요 개처럼.” (p.309)


사실 이 뒤섞이고 뒤틀린 역사는 소설 속 사건들에 대한 독자들의 편리하지만 안이할 수도 있는 이해의 여지를 -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 피해자와 가해자, 흑과 백 이라는 - 속속들이 차단하고 있다. 작가는 1998년 번역가의 남아공의 상황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현재, 옛것과 새것이라고 희망했던 것 사이의 불안하고, 점점 더 편치 못한 틈에 있는 것 같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성, 나이듦, 여성, 인종 그리고 인간의 여러 권력 관계를 망라하는 소설 속의 주제들은 아마도 그 요동치는 불안의 틈바구니에서 솟아오른 것들일 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설을 긴장 속에서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것은 (개를 닮기도 하였고 개처럼 스러질 수도 있을지언정) 인간의 이야기이므로...



J. M. 쿳시 / 왕은철 역 / 추락 (Disgrace) / 동아일보사 / 344쪽 / 2000, 2004 (1999)



ps. 우리나라 출간본의 제목은 '추락'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원제의 의미는 '치욕'에 가깝다고 한다. 이 소설은 2008년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미개봉작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현재 '수치'로 번역되어 있다. 아 그리고 영화에서는 존 말코비치가 대학교수인 루리의 역할을 맡았다.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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