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이름 뒤에 숨은 사랑》

동시대인으로서 이 작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행운...

by 우주에부는바람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동시대인으로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곳까지, 사소하면서도 정밀한 주변 묘사에서 한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부분 허투루 다루지 않는 이 완결성이 경이로우면서도 즐겁다. 생각해보니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 모두 (어떤 작가는 단편에서는 장기를 발휘하지만 장편에서는 그러지 못하고, 또 어떤 작가는 그 반대이기도 한 경우가 있는데...) 어느 하나 함량 미달인 것이 없다.


“... 그의 가족의 삶은 예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았던 하나의 사고가 다음 사고를 낳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아버지의 기차 사고였다. 이 사건은 처음엔 아버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었지만, 나중에는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을 낳게 하였고, 세상 저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했던 것이다. 다음은 고골리의 증조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 담긴 편지가 캘커타와 케임브리지 사이 어딘가에서 사라진 사고였다. 이로 인해 얼떨결에 고골리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고, 이 이름은 수년 동안 고골리라는 한 인간의 윤곽을 형성함과 동시에 괴롭혀왔었다. 그는 이런 임의성을, 이런 빗나감을 바로잡으려 해왔다. 그러나 자신을 완벽하게 새로 창조하는 것은, 그 엉뚱한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결혼 또한 실수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가족의 곁을 떠나신 것은 사고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사고였다... 그러나 고골리를 형성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것들은 사전에 준비가 불가능한 일들이었지만, 되돌아보려면, 돌아보며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들인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제자리를 벗어난 곳에서 잘못 일어난 일들이지만, 결국 끝까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삶을 견뎌낸 것들이었다.” (pp.369~370)


그저 발성되는 임의의 단어일 뿐인 이름이 어떻게 한 사람을 혹은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하게 되는지를 소설은 바로 그 이름과 한 인간의 대결의 양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 승부는 지금 끝이 난 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이름을 갖게 되면서 그 이름에 품어진 듯도 하고, 반대로 한 인간이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가 결국 그 이름을 품게 된 것도 같은 스토리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다시 한 번 양자간의 교차가 일어날 뿐 아직도 계속되는 또 다른 스토리의 서막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소설의 뿌리 혹은 그 이름의 뿌리는 1961년 일어난 기차 사고와 그 기차 사고의 희생자일 뻔하였던 인도인 아쇼코에게서 비롯된다. 아직 학생이던 아쇼코가 들고 있던 고골리의 책은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던 아쇼코를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만들고 그는 살아난다. 이와 함께 사고 직전 대화를 나눈 사내로부터 받은 어떤 영감은 아쇼코의 생명을 구하고, 그를 인도에서 미국으로 떠나가도록 만든다.


“... 그가 감사해야 할 또 한 명의 죽은 영혼이 있었다. 책에 감사할 수는 없었다. 그가 맞이할 뻔했던 운명처럼 책은 갈가리 찢겨진 채, 캘커타에서 209킬로미터 떨어진 들판에서 시월의 이른 아침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신에게 감사하는 대신, 그의 목숨을 살려준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에게 감사하였다...” (p.35)


그렇게 아쇼코는 미국에서 아시마와 함께 사내 아이를 낳는다. 어른들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아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 인도에서 날아올 이름을 기다리지만 우편은 결국 도착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날아온 이름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할 운명이었던 고골리라는 이름은 이제 아이에게 각인된다. 그리고 한 차례 니킬이라는 등록된 이름으로 교체될 수 있었던 고골리라는 이름은 그러나 자신이 고골리라는 이름대신 니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길 완강하게 반대한 유치원 입학 시절의 고골리에 의해 그 운명을 계속하게 된다.


“...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p.71)


미국에서 태어나 러시아 작가의 이름을 갖게 된 인도인이라는 설정은 그 배경만으로도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물론 이러한 캐릭터는 작가 개인의 여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뱅골 출신 이민자 가정의 영국 런던 출생이면서 다시 미국으로 이민하여 성장하였다는 작가의 이력이 어쩌면 고스란히 고골리라는 캐릭터에 묻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줌파 라히리는 이 작품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인도를 떠난 인도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캐릭터들이 어떤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하지 않는다. 비슷한 배경의 모든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모든 캐릭터는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서 분명하게 구별되는 입체적인 이야기들을 한다.


이번 소설의 고골리 또한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뱅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인도계 미국인이라는 비슷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분명한 색깔을 지니며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애칭이었지만 본명처럼 사용하는 고골리라는 이름에 대해 갖는 감정은 인도계 미국인이라는 한계와 맞물리면서 애정이 되었다가 굴레가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이 섬처럼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민자 가족간의 관계 그리고 그곳에서 일구어나가는 이런저런 사랑의 양태들과 적절히 뒤섞이면서 진행된다.


“.... 그런 건 없어... 이 세상에 완벽한 이름이란 없다는 말이야. 나는, 사람은 열여덟 살이 되면 자신의 이름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때까지는 모두 대명사로 불러야 해.” (p.317)


니킬과 고골리라는 이름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고민하였던 (소설이 끝난 후에도 그 여정의 끄트머리를 확고히 예측하기는 힘든) 한 사내의 일대기 (중 일부라고 볼 수도 있는)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의 여운이 길다. 끝이 났으나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모호하지만 한 권 소설의 독서라는 긴 여정에 불만을 갖기 힘들다.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기보다 그 증명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을 특기로 하는 줌파 라히리 소설의 뿌리는 참으로 깊다.



줌파 라히리 / 박상미 역 / 이름 뒤에 숨은 사랑 (The Namesake) / 마음산책 / 383쪽 / 20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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