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비의로 충만한 줌파 라히리의 오묘한 시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줌파 라히리는 오묘하다. 작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절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인물을 눈에 보이는 듯 묘사할 뿐이다. 그 인물의 상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절대 넘겨 짚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의 외관을 묘사하거나 그들의 역사를 그저 있는 그대로 - 건조하게도 그렇다고 습하게도 아닌 - 서술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나면 너무나 환하게 그들 모두의 감정 구석구석에 연결되고 만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그만 떠올리게 되고 만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소설들이다.
「길들지 않은 땅」.
“... 로미와 루마를 밴 침실은 아침 해도 안 드는 음침한 방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그 방을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생각했다. 아이들이 집 안을 뛰어다니던 모습이며, 어릴 적 목소리가 기억났다. 이 시기의 삶은 그와 아내만 알고 있다...” (pp.39~40)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루마의 아버지는 혼자서 살고 있다. 그런 루마의 아버지가 결혼해서 남편과 어린 아들 아카시를 방문한다. 퇴직하여 여행을 다니며 소일하는 루마의 아버지는 여행 중에 만난 박치 부인과 사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루마와 루마의 아버지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인도식 관례에 따라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인지 루마는 고민 중이기도 하다. 루마의 집에서 루마의 아버지는 박치 부인에게 엽서를 한 장 쓰게 되지만 결국 아카시가 집어 가는 바람에 부치지 못했다. 그리고 루마의 아버지가 떠난 이후 루마는 이 엽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들 부녀지간에 흐르는 묘한 감정의 기류들이 이 엽서 한 장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기류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이 가족의 만남을 향한 우리들의 시선을 슬쩍슬쩍 흔들어댄다.
「지옥-천국」.
『... 엄마는 코트 깃을 열고 점화용액 통의 뚜껑을 열어 용액을 몸에 부은 후 다시 단추를 채우고 벨트를 조였다. 그리고 집 뒤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가서 용액을 버린 후 뒤뜰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코트 주머니 속엔 성냥 한 갑이 들어 있었다. 거의 한 시간이 되도록 엄마는 거기 서서 집을 쳐다보며 성냥불을 그을 용기를 내고 있었다. 엄마를 살린 건 나도, 아빠도 아니었다. 엄마와 그다지 친하지도 않던, 옆집에 사는 홀콤 부인이었다. 그날 뒤뜰에 낙엽을 치우러 나왔다가 엄마를 보고 노을이 너무 아름답다고 말을 걸었다. 그러곤 “이제 한참을 보셨지요” 했다. 엄마는 그 말에 수긍했고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일찍 아바와 내가 집에 왔을 때 엄마는 부엌에서 여느 날처럼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p.104)
아마도 사랑 없는 결혼을 한 후 미국에 살고 있던 엄마는 어느 날부터 자신의 집에 방문하기 시작한 프라납에게 연모의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던 나에 의해 서술된 이 엄마의 일대기가 밋밋하게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마지막에 보여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독자의 마음 속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서술자인 나에 의하여 갑갑하게만 묘사되던 한 여인의 감정이 갑작스럽게 파도처럼 독자를 덮친다. 참으로 속수무책이 되어 버린다.
「머물지 않은 방」.
“... 모니카가 태어나고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각자 혼자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지 않았던가? 쉬는 날 아내가 아이들을 볼 동안 그는 공원에서 조깅을 했고, 또 거꾸로 아내가 서점에 가거나 네일 살롱에 갈 수 있도록 그가 아이들을 보았다.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혼자 있는 그 순간을 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오죽하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가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이라 생각했었는지 말이다.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 아밋이 매건을 그리워한 것처럼 매일 밤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pp.140~141)
고등학교 시절 은사의 딸이며 많은 이들의 마음 속 연인이었던 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1박 2일 동안의 여행을 하게 된 아밋과 메건 부부는 그러나 맡기고 온 두 자녀가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로운 시간을 애써 가지려 하지만 그만 아밋이 취하여 방으로 돌아와 쓰러져 자는 바람에 두 사람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여행이 진행된다. 혼자이던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촘촘해진 생활의 한 축으로 작용하게 된 뒤의 부부란 어떤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부부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저 좋은 사람」.
“..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자기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p.210)
수드라는 라훌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술을 가르쳐준 적이 있다. 부모님 몰래 술을 사다가 자신의 방에 숨겨 놓아 주기도 했다. 시간은 흘렀고 그렇게 수드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인 남자와 결혼을 했다. 라훌은 대학생이 되면서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대학을 그만두었으며, 집으로 돌아와 있는 듯 없는 듯 부모님과 생활을 하다 그 집을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라훌은 영국의 수드라를 방문했다. 알콜 중독이 치료되었다고 했고 한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아이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카인 닐을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라훌은 그렇게 꼭꼭 잠근 줄로만 알고 있던 상자를 다시 열고 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수드라 또한 휩쓸려 날아간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모르는 일」.
“그가 정말 나 없이 못 산다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는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요. 여자들에게 의지를 하니까요.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면서 그 여자들이 없으면 도저히 못 살 것처럼 굴죠. 당신이 아까 오후에 전화했을 때 온 사람이 바로 그였어요. 나를 보고 싶어하면서, 아직도 나를 달아두고 싶어하죠. 그는 친구가 없거든요. 애인만 있죠.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족과 친구가 필요한 것처럼 그에겐 애인이 필요한 것 같아요.” (p.255)
생의 하우스 메이트인 폴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 그러나 생에게는 오랜 시간 애인으로 지낸 파룩이 있다. 그러나 생이 집을 비운 어느 날 폴은 생의 남자 친구인 파룩에게 여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 여자 디어드라와 통화를 하기까지 한다. 한 여자를 파탄에 빠뜨리는 그 남자의 이야기이자 그 여자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야 하는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또다른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집 전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위에 언급된 다섯 편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은 <헤마와 코쉭>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묶여 있다. 이 세편은 일종의 연작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스치듯 마주쳤던 소녀 헤마와 소년 코쉭의 일대기이며, 이 두 사람 사이의 겹치고 포개지거나 흩어지고 쪼개지는 어떤 운명을 세 편의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일생에 한 번」.
“... 이윽고 내가 울음을 그쳤을 때 너는 우리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 나는 네가 발견한 길을 뒤따라갔지. 그러곤 우린 헤어졌어. 서로 위로해주지도 않은 채, 너는 집 앞에 눈을 치우러 나는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러 집으로 들어갔어...” (p.302)
첫번째 단편은 헤마가 코쉭을 보내는 일종의 독백 형식을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헤마가 코쉭의 존재를 인지한 여섯 살 무렵 코쉭은 아홉 살이었다. 그것은 코쉭이 인도로 떠나는 송별 파티에서였다. 하지만 코쉭과 그의 가족은 코쉭이 열여섯 살, 헤마가 열세 살이었을 때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얼마간 헤마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제 막 사춘기를 겪고 있을 나이인 헤마 앞에서 코쉭은 그러나 전혀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코쉭의 태도에는 이들 가족이 갖는 비밀이 도사리고 있었고, 코쉭은 이를 헤마와 짧고 강렬하게 나눈다.
「한 해의 끝」.
“... 루파와 피우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어. 그날이 나를 위한 날이라는 것도 존중을 해주었고, 하지만 전에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굴었어. 아이들이 치트라나 아버지에게 내가 한 말이나 한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일은 우리 셋 사이에 비밀로 남아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또 그 침묵이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벌을 주기 위한 방법이란 사실도. 그날 밤의 기억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끈이었고, 덕분에 다른 모든 관계는 지워진 것 같았어...” (pp.353~354)
두 번째 단편은 코쉭의 독백이다. 코쉭은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그 사이 코쉭의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코쉭은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지보다 거의 스무 살이 어린 여인이고, 루피와 피우라는 두 딸이 있다. 코쉭은 방학을 맞아 집에 와서 이들 새로운 가족과 만난다. 이 젊은 새엄마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어린 동생들에게는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작고 어린 동생들이 자신의 엄마의 사진을 찾아내고 수군거리는 걸 듣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선다. 아버지와 새엄마가 없을 때였고, 어린 동생들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으며, 코쉭을 믿고 두 사람이 처음으로 둘만의 외출을 하고 있는 동안이었다.
「뭍에 오르다」.
“코쉭의 아파트에 있는 조그만 텔레비전에선 언제나 국제 뉴스 채널이 소리 없이 켜져 있었다. 그의 일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관련 있었다. 이미 쓰인 텍스트나 죽어버린 사람들이나 장소를 반복해서 되살리는 일들이 아니었다...” (p.380)
세 번째 소설은 3인칭으로 진행된다. 서른 일곱의 헤마는 혼자 로마를 여행하는 중이다. 줄리안이라는 유부남과의 오랜 만남, 그러나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과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홀로 마지막 여행을 왔다. 그리스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종신교수를 앞두고 있는 그녀는 그리고 이곳에서 저 옛날의 코쉭과 우연히 만난다. 코쉭은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는 사진 작가이다. 곧 홍콩의 국제 시사 주간지의 사진 편집자로 갈 예정인데 남은 시간을 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내고 있다. 그렇게 어딘가로 향하는 경유지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조우하였고 (어린 시절 코쉭의 가족은 인도에서 미국으로 오는 중간에 로마에 들렀고, 그때 찍은 사진을 헤마네 가족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연작 소설의 맨 마지막은 헤마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소설은 약 삼십 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헤마와 코쉭이라는 두 인물의 역정을 따라 흘러간다. 세 개의 소설은 모두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을 중심에 놓고 있다. 헤마와 코쉭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들만이 아니다. 이들은 상대방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과도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도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 그것이 삶이다, 라는 사실을 참 담담하게도 (그러나 때때로 비밀스럽고 치명적이게도) 그리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에 깃들어 있는 삶을 충만하도록 만드는 어떤 비밀이라는 열쇠로 가득한 소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소설을 통해 때때로 문이 열리는 우리들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게 된다.
줌파 라히리 / 박상미 역 / 그저 좋은 사람 (Unaccustomed Earth) / 마음산책 / 411쪽 / 2009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