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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부유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제어하는 휘발의 정서...

by 우주에부는바람

작품집 속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주로 제 뿌리와 같은 어떤 장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다. 부유하는 듯한 인물들을 주로 그리고 있는 작가의 특성이 이번 소설집에서는 장소의 설정으로 더욱 도드라진다. 시골 주인공에게는 서울이, 서울 주인공에게는 신도시가 새로운 배경이 되어 주인공들을 부유하게 만든다. 이곳에 정주하고 있어도 그들은 프랑스어를 꿈꾸거나 스페인에서 보낼 엽서를 꿈꾼다. 그렇게 그들은 저 곳으로 옮기는 통에 헤매이거나 여기에 머물러 있어도 모호하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열두 살, 크리스마스 정오 무렵에 안나는 루시아를 처음 만났다. 꼬마전구와 꽃으로 장식된 성모상 앞에서였다...” (p.11) 바닷가 작은 도시에 살고 있던 안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루시아와 친구가 된다. 그들은 그렇게 여섯 번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고,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를 위해 함께 서울에 올라오게 된다. 시골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두 사람이지만 서울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판이하게 다른 자매가 살고 있는 집의 방 한 칸에서 하숙을 하는 안나와 잘 사는 본가에서 사는 루시아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간극이 생긴다. 그리고 학원에서 안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요한은 결국 루시아의 남자 친구가 되고, 안나는 루시아가 문제가 생겨 나오지 못한 크리스마스에 요한과 어떤 만남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안나와 루시아가 바라마지 않았던 아무 일은, 그 크리스마스에 일어나지 않는다. “1976년 크리스마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왕성이란 이름은 천체에서 사라졌고 그리고 화성에 내리는 눈,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사이도 마리코, 「눈보라」중에서), 그것은 지상에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p.42)


「프랑스어 초급과정」.

어린 여자는 한 남자를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한다. 어린 여자는 그 남자에게 프랑스어를 공부할 것이라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결혼과 함께 자신의 집과 결별을 한 여자는 K라는 이름의 신도시에 둥지를 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연고지였던 서울로부터 벗어난 그곳, 이제 서서히 도시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 그곳에 그녀는 제대로 안착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를 K시에 두고 남편은 서울로 일을 하러 간다. 그리고 점점 그녀는 서울로부터 멀어지면서 어쩌면 서울을 그리워하는 것만 같다. 제대로 가벼워지지 못하여 충분히 이식되지 못한 그녀는 그 사이 임신을 하게 되고, 뱃속의 아이는 엄마의 반쯤 떠있는 듯한 생을 목도한다.


「스페인 도둑」.

소영은 신도시에서의 어린 시절 완이라는 친구 집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월드컵 축구 경기를 친구들과 함께 시청했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떨어진 단추로 인해 벌어지려는 고복의 앞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 뿐... 그리고 이제 소영은 그 신도시의 은행 출장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완은 그 사이 오랜 시간의 유학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유학을 하고 있는 그곳을 엄마는 매년 찾아왔고 아버지까지 포함하여 셋은 간혹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완은 자신의 여권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완이 돌아오기 전 부모는 헤어졌다. 완은 신도시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서울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그 사이 완은 통장을 개설하러 갔다가 소영과 만나게 되고, 소영은 스페인에 가면 완에게 엽서를 보낼 것이라고 다짐한다.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나는 어떤 사람이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잠시 T아일랜드로 떠나와 있는 열세 살의 나를 향하여 엄마는 묻는다.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한 이곳에서의 삶에서 엄마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오래된 물건을 직접 집에서 파는 일종의 장터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두서없이 사들인다. 그해 여름 그 미국 가정의 잔디밭에서 이루어졌던 거래들과 그 거래의 결과로 엄마가 수집하였던 물건들에 대한 추억이 모호하다.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유럽 연수를 떠난 유나의 집에서 살고 있는 이원은 어느 날 그 집에 있던 목도리를 가지고 나갔다가 그만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유나의 집에 찾아온 태현을 통하여 그 목도리가 실은 유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이원은 목도리를 직접 뜨기로 작정한다. 여러 가지 버전을 가지고 있는 난쟁이와 왕비가 나오는 동화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약간 흥미로울 뿐...


「금성녀」.

어린 시절 작은 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자라난 유리와 마리 자매는 이제 칠십이 넘은 나이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마리는 자살에 의한 언니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서게 된다. 성향도 다르고 걸어온 길도 달랐던 자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제 모두 늙었고, 유리는 죽었다. 마리는 유리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친척 손주뻘인 완규, 그리고 완규와 비슷한 또래인 현과 함께 차를 타고 장지를 향하게 된다. 그 사이 회상이 되는 마리의 젊은 시절의 몇몇 시퀀스들... 그것들 중 하나에 얼핏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속의 안나가 비춰진다.


단편집 속 소설들의 인물들이 아주 사소한 연결고리들로 엮인다. 그것이 너무 사소하거나 명확하지 않아서 이 소설들을 하나의 연작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어떠한 의도가 개입하고 있다고 볼 여지는 있다. 어쩌면 부유하는 이들을 하나의 줄로 묶어 둠으로써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그 휘발의 정서를 제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다. 작품 속 인물들의 정서가 그리 위력적으로 다가서지 않으니, 그러한 제어가 굳이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다.



은희경 /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 문학동네 / 245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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