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우리들과 만나게 되는...
소설은 2010년 12월 7일 화요일에서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까지 브뤼쎌에서 머물고 있던 나의 기록이다. 나는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었지만 어떤 연유로 인하여 그만둘 결심을 하였고, 문득 잡지에서 읽은 로기완이라는 탈북인의 기사를 생각해냈다. 방송 작가를 그만둔 다음 뭔가 나만의 글을 쓸 작정을 하면서 떠올린 것은 그 기사에 실린 마지막 한 줄이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라는 그 문장에 이끌려 이곳 벨기에의 브뤼쎌까지 오게 되었다.
“... 그날 박은 로기완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 우편으로 보내온 일기 한 권과 난민 신청국 심문실에서 작성한 자술서 사본을 내게 주었다. 둘다 로기완이 직접 쓴 글이었다. 그 자료들은 불투명한 이방인 이니셜 L이 사실은 로기완이라는 구체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기록이면서, 동시에 박이 내게 준 또다른 의미의 열쇠였다...” (p.25)
2010년 나의 현재의 여정은 그러나 곧 몇 년전 진행되었던 로기완의 여정이기도 하다. 나의 여정은 로기완의 여정 위에 습자지를 대고 그 위에 다시 한 번 그리는 여정과도 같다. 로기완은 어머니와 함께 북한을 탈주하여 연길에 머물다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베를린을 거쳐 벨기에의 브뤼셀까지 흘러왔던 탈북인이다. 그는 어머니가 낮과 밤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숨어 살았고, 그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는 그 시체를 팔아 마련된 여비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재이는 연민이란 자신의 현재를 위로받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대상화하는, 철저하게 자기만족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pp.52~53)
로기완의 여정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여정은 바로 지금 서울에서 수술을 진행하고 있는 윤주를 그 원인으로 삼는다고 할 수도 있다. 윤주는 동료이면서 비록 서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지는 못했던 연인이기도 하였던 제이와 함께 만들던 프로그램의 출연자이다. 얼굴 한쪽을 뒤덮고 있는 섬유종으로 고통 받던 윤주를 돕고 싶은 마음에 방송 시기를 조절하고, 수술 날짜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던 나는 실제 수술에 들어가기로 하였을 때 그 섬유종이 악성으로 판명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좌절했다.
“로에게 대사관이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는 윤주가 희망과 절망이 결합된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애에게 내가 걸었던 희망은 무엇이고 예감했던 절망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분할 수가 없다. 그애가 뒤늦게라도 나를 용서해줄 거라는 믿음과 끝까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각각 어떻게 희망과 절망으로 열결되는건지, 용서받음으로써 가벼워지고 싶다는 마음과 그렇게 쉽게 용서받아서는 안된다는 엄정한 마음 중 무엇을 더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해답을 알 수 없다.” (p.94)
어쩌면 나는 로기완의 여정을 쫓는 그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가해진 어떤 고통의 답을 찾고 싶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로기완의 여정에 도움을 주었던 박이 나에게도 자신이 겪은 아내의 안락사라는 경험을 넌지시 전달해준 것 또한 알 수 없는 해답을 위한 어떤 열쇠의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정의 마지막 즈음, 수술을 무사히 마쳤지만 귀를 잃은 윤주, 바로 그 윤주의 귀를 ‘그것’으로 수습하는 나는 명징하지는 않지만 어떤 해답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소설 속의 여정은 로기완의 여정이기보다는 나의 여정에 가깝다고 보아야겠다. 나의 여정이 모두 끝난 다음 ‘노트에 적지 못한 남은 이야기’에 와서야 겨우 로기완의 실루엣을 보는 소설이 ‘로기완을 만났다’라는 제목을 갖는 것은 그렇게 아이러니가 된다. 소설의 여정 속에서 나는 로기완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러나 로기완을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들 삶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한 번도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우리와 만나기도 한다.
조해진 / 로기완을 만났다 / 창비 / 198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