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악스런 파격의 작가가 증오를 거두고 돌아왔다는 전갈...
「혀끝의 남자」.
인도, 신이 많은 나라, 그 나라를 여행하는 중에 나를 스쳐간 어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등장한다. 혀끝의 남자는 혀끝의 여자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혀끝의 신일 수도 있다. “... 나의 종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 (p.49) 문단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복귀를 선언하고 작품집을 낸 작가의 일종의 복귀 선언 같은 작품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예전 그악스런 파격이 담겨 있다 여겨지던 작가의 혀는 (문단의 폐쇄성이 그악스럽던 당시, 예전 출신인 그의 책이 문학과지성사, 라는 출판사에서 출간이 된 것 자체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 그저 무난해 보인다. 그 혀끝에 불이 붙어 있다고 봐야 할지 알 수 없다.
「폭력의 기원 - 작은 절골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던 작은절골, 그러니까 동네 어귀 낮은 산 중턱 어딘가에 있는 공터가 어렴풋하게 그려진다. 그곳에서 발견한 작은 구멍, 범접하기 어려운 그곳을 아지트로 삼았던 친구, 그리고 성장하면서 갖게 되던 작은 폭력의 기원 같은 것도... 하지만 이제 그 곳 혹은 그 시절에 따라 붙는 일은 부질없는 것일는지 모른다. “... 나는 노부부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 길을 따라가면 엉뚱한 곳에 가 닿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내 기억에 작은절골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축복받은 골짜기로 가는 골목들은, 지금 내 기억이 그런 것처럼 어디쯤에선가 막혔다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거나, 아니면 영원히 지워져버렸다.” (p.79)
「연옥 일기 - 신릴한 돼지 피가수스Pigasus 혹은 아직 규정되지 않은 세계에서」.
제목만큼이나 난해하다. 일종이 기록이기는 한데 무엇을 기록하려고 하는지를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기록이라고나 할까... 하늘을 나는 돼지와 k와 철수가 제대로 실체를 구성하지 않은 채로 작가에 의하여 설교, 되고, 있다.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
신데렐라를 향해 질주하는 캐리어 우먼으로 가득한 도심 빌딩숲, 그곳의 한켠 후미진 곳에 있는 작은 책방, 에는 바로 그 캐리어 우먼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미스터리한 책방의 여주인이 있다. ‘능력은 있지만 가난한 오피스 레이디들을 위한 게임’이 무엇인가를 어쩌면 우리는 금세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하이브리드의 기색도 없이 뻔뻔하게 되풀이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게임이 소설 속 ‘신데렐라 게임’이다.
「일천구백팔십 년대식 바리케이드」.
“...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도 더 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라는 사람은 바리케이드란 물질적이라기보다 정신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썼다. 바리케이드는 그때 이미 시가전에서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해 겨울 바리케이드 너머의 함성은 그 모호함과 집요함과는 상관없이, 어쩐지 천부적인 슬픔을 품고 있는 듯했다...” (pp.156~157) 바리케이드의 무용함을 언급하고 있는 작가의 이런 글이 오히려 철지난 폐기 종용쯤으로 읽힌다.
「재채기」.
어느 동네 작은 작업실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재채기를 한다. 세상으로부터 제 물건들의 박탈을 종용당한 이들의 바로 그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는 그 작업실의 여자와 만나 대화를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는 데엔 노력이 필요 없어요. 연기할 때처럼 리허설도 필요 없고...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세상이 그리 만들어놓지요.” (pp.189~190) 최루탄의 추억이 때늦은 재채기를 일으킬 정도로 묻어 있는 소설이다.
「항구적이며 정당하고 포괄적인 평화」.
빈 총을 들고 허공의 적을 향한 채 (평화롭기 그지 없는) 무료함을 달래야 하는 어느 예비군 훈련의 한 토막이라고 해야 하겠다.
「시속 팔백 킬로미터」.
쓰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은유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저 제목은 세상의 속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상대적으로 느린 나의 속도를 비트는 것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생각의 속도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생각의 속도에 비해 현저하게 느린 쓰는 행위의 속도라고 봐야 할까...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
“글쓰기를 그만둘 무렵의 나와 부딪혀야 했던 사람들은 내 성마른 언동에 매번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 마지막 두어 해 동안 나는, 애써 내게 다가오려 했던 이들을 공격해 곤혹스럽게 하곤 했다. 이 죄송한 마음을 어찌 다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p.225) 그러니까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을 남발하였던 작가 자신의 자기 고백이자, “십 년 전 글쓰기를 그만두면서 나는 내 삶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우격다짐으로 글쓰기를 계속했다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p.227) 당시의 상황에 대해 우회적으로 설명하며 자기 변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자크 아순이라는 작가의 『증오의 모호한 대상』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긍정한다. 『내가 글쓰기를 그만두자 비로소 그 끔찍한 세계의 문도 조금씩 닫히기 시작했다. 자크 아순은 같은 책에서, 증오란 “사랑의 이면”이 아니라, 사랑이 “중단”되었을 때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그 문은 닫혔고, 나는 글쓰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p.231)
백민석 / 혀끝의 남자 / 문학과지성사 / 256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