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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외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우리의 삶에 최적화된 은유, 그런데 우리의 삶은 오히려 희미해져만 가고.

by 우주에부는바람

편혜영의 「몬순」.

단전을 진행하게 될 아파트의 주민인 태오와 유진... 부부인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위기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직한 사실을 아내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한 태오, 단전이 되는 날 불꺼진 어두운 집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는 유진... “... 유진 씨한테 유치한 질문을 많이 했어요. 왜 태풍의 진로는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냐, 풍향은 언제 바뀌냐 하는 것들이요... 그렇게 규모가 큰 바람은 언제 방향을 바꾸는지, 그 순간을 미리 알 수는 없는지, 그런 건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유진 씨한테 물어도 믿을 만한 얘기는 별로 말해주지 않았어요. 바람은 부는 방향이 바뀐 후에야 정확한 풍향을 알 수 있다고만 했어요... 내가 다시 물어보니까 등압선을 보면 풍향을 짐작할 수는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확신할 수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고 말입니다...” (pp.28~29) ‘그저 최선을 다해 짐작할 뿐’인 우리 삶의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리에 짙게 깃들어 있는 불안이 적절히 비유되어 있는 문장과 상황이 좋다. 다만 정전 그리고 아이를 잃은 부부라는 설정이 최근에 읽은 줌파 라히리의 단편 <일시적인 문제>와 자꾸 오버랩된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

작가가 대표작으로 꼽은 것은 2011년 발표한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 실려 있는 표제작 〈저녁의 구애〉이다. 어느 날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의 화환을 주문받는 나... 그러나 그 화환을 트럭에 싣고 달려간 그곳에서 아직 그 화환의 주인이어야 할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되,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시에 남아 있는 여자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그를 만나고 싶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조심해서 오세요. 그분이 빨리 돌아가실 빌게요.” 바로 그 저녁에 이루어지는 어설픈 구애... 라고 적고 있다. 다시 한 번 읽는게 그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편혜영의 「타인의 삶」.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쓰는 ‘문학적 자서전’이다. 어린 시절 공공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발견한 인구조사서 안의 내용들, 그것들을 펼쳐 놓던 책상과 그곳에서의 막막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누구나 소설을 쓰는 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각각의 단순치 않은 삶을 상상해보는 것으로, 웅크린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것으로,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뻔한 상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그 막막함을 조금 덜 수 있었다고.” (p.71)


김숨의 「법法 앞에서」.

만약 자신의 아이가 또래 아이를 가해한 아이들 중 하나가 되어, 그 아이로 인하여 법정에 서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혹은 평범이라는 성질과 의미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범’이라는 말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자면, 다섯 번째 아이가 되기 전까지 그의 아들은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p.127)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거론하며, 이 평범한 아이의 어느 곳에 가해 학생 중 다섯 번째 아이가 되는 유전자가 깃들어 있던 것일까, 어느 곳에서 시작된 가해의 징조가 지금 현재의 그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손홍규의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한 일종의 축약된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진 도시, 그곳에서 증빙된 어떤 자료들을 통하여 가까스로 하나의 가족으로 다시금 맺어지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아주 섬뜩하지만 동시에 예민하게 서술되고 있다.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며 단편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좀더 공을 들여 중편 이상의 글로 풀어냈다면 어떠했을까...


천명관의 「파충류의 밤」.

“지금 지구는 포유류의 시대지만 오래전 파충류는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이 땅의 지배자였지요. 수경 씨 머릿속에서 들리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아마도 그 파충류가 울부짖는 소리였을 겁니다... 우리 뇌가 세 개의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건 알고 있죠? 인간의 뇌라고 불리는 대뇌피질과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 그리고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뇌간이 바로 그것인데, 뇌간은 기억이나 학습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변연계와 달리 저 밑바닥에서 조용히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죠. 까마득한 옛날 파충류의 본능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pp.182~183) 세상을 온통 떠돌아 보았고 하릴 없이 자위에 몰두해 보기도 했지만 수경은 아직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시 원고를 정리해야 하는 수경의 이야기이자, 수경의 끊어지지 않는 시간을 툭 분지르며 들어온 한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실려 있는 작품들 중 가장 호감이 가는 작품이다. 젊은 사진 작가인 권은과 나 사이의 어떤 인연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알마 마이어와 그의 아들 노먼 마이어 그리고 알마를 숨겨 주었던 알마의 연인인 장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권은과 나 사이의 이야기가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연결되고, 알마의 이야기가 헬게 한센의 영상에 의하여 풀어지는데 이 둘이 어긋남 없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윤고은의 「프레디의 사생아」.

향수 회사를 차리고자 파리에 자리를 잡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알고보니 프레디 머큐리가 잠시 살았던 곳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종종 듣는다. 나는 이제 내가 만드는 향수를 알리기 위하여 이 집을 이용하고, 향수의 이름에도 프레디 머큐리를 집어 넣는다. 하지만 이렇게 그 집을 프레디 머큐리의 것들로 채우고 또 채우는 동안 나의 향수는 내가 원하던 것처럼 인지도를 얻게 되지만, 그곳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사라지게 된다.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

작가가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들이 떠올리는 것은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이 된다, 고 작가는 단언한다. 그리고 이후 우리를 차분하게 설득해 나간다. 보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그 보지 않은 것이 사실로 바뀌게 되는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한 설명이 묘하게 설득력 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떠오르고 떠올리려고 할 때 오히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반어법적인 삶, 이라는 아이러니가 잘 설명되고 있다.


윤이형의 「쿤의 여행」.

어린 시절과 그 후를 가르는 어떤 지점을 우리가 생각하는 동안,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하나의 덩어리인 ‘쿤’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마흔이 되어서 그 ‘쿤’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다시금 열 다섯 살로 돌아간 여인, 한 소녀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한 이 여자는 그렇게 ‘쿤’을 떼어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안보윤의 「나선의 방향」.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와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후 동생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이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세상의 후미진 곳으로 거처를 옮겨가게 되지만 운명은 그곳까지 남자를 따라온다. 부모의 죽음, 동생의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의 죽음에 이르는 이 남자의 삶, 바깥으로 확장되는 삶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수렴하는 삶은 결국 그 남자의 사라진 목소리의 진원지인 그 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툭툭 모래가 떨어진다.


읽다보니 작품집에 실린 거개의 소설은 우리 삶을 얼마나 최적화된 방향으로 은유하느냐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만 같다. 최근에 읽은 해외 작가들의 단편집들이 그저 우리의 삶을 잔잔히 훑는 것으로 끝을 내면서 그렇게 뿌려진 씨앗 이후를 통째로 독자에게 맡기는 반면, 우리의 소설들은 수수께끼 같은 은유의 테크닉으로 삶을 감싸 안은 채 그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살펴보라고 독자에게 숙제를 내는 것만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편혜영의 작품이 대상 수상작이어야만 하는 어떤 연유가 보이는 것도 같다.



편혜영, 김숨, 손홍규, 천명관, 조해진, 윤고은, 이장욱, 윤이형, 안보윤 / 2014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 362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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