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에서 창조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아룬다티 로이의 일성...
*2014년 3월 1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1998년 《프런트라인》과 《아웃룩》이라는 두 잡지에 동시에 머릿기사로 실렸던 아룬다티 로이의 <상상력의 종말>, 그리고 마찬가지로 1999년 두 잡지에 함께 실렸던 <공공의 더 큰 이익>이라는 두 개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발표한 순서는 <상상력의 종말>이 앞섰지만 책에서는 <공공의 더 큰 이익>이라는 글을 앞에 배치하였다. 십 오륙 년 전 글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현재의 우리들의 상황 옆에 갖다 놓아도 매우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 우리에게는 작은 영웅들이 많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작은 영웅들을 격려해야 한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21세기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폭탄들, 거대한 댐들, 거대한 이데올로기들, 거대한 자가당착들, 거대한 국가들, 거대한 전쟁들, 거대한 영웅들, 거대한 실수들, 이런 것들에 대한 해체... (p.33)
- 문득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송전탑 공사 강행에 저항하는 노인분들이 떠올랐다. 거대한 댐 공사로 인해 한 순간 터전을 잃고 그곳을 떠나야 하는 인도의 나르마다 강 유역 사람들과 갑작스레 자신의 마을 위로 지나가는 송전탑으로 인해 삶에 위협을 당해야 하는 밀양의 노인분들이 오버랩되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라는 거대 권력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터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현실, 그들이 인도의 하층민 계급과 우리의 촌로처럼 약자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적 약자인 이들이 작은 영웅이 되어 싸우는 것까지...
“인도인들은 너무 가난해서 국내에서 생산한 식량을 살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먹을 여유도 없는 종류의 식량을 산출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1996년에 발생한 가뭄 때문에 사람들은 배를 곯아 죽어갔다. 그 숫자는 정부 통계에 따르면 16명이고 언론에 따르면 100명이 넘는다. 그렇지만 같은 해에 칼라한디 지방에서 산출된 쌀의 생산량은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 (p.49)
- 얼마전 서울에서 있었던 세 모녀의 자살 사건이 떠올랐다. 연일 수십억 하는 아파트 매매값이나 수억하는 전세값의 동향만이 우리 삶의 바로미터인 양 떠드는 동안 우리들 이웃들 중 누군가는 죽는 순간까지 죄송스럽다는 말을 내뱉으며 마지막 쥐어짠 돈 70만원을 자신들 옆에 내어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저 일종의 조어가 아니라 정말 돈만이 돈을 벌 수 있게 되어 버린 세상, 돈은 이제 단순히 실재하는 뭔가를 거래하기 위한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가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 (p.54)
-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 국정원과 검찰,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내뱉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아버님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말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을 변명하고 해명하고 앞의 말을 번복하고 부정해도 아버지의 믿음은 끄덕 없다. 그분의 그러한 믿음이 현재의 희망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따지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지만, 위의 문장을 읽다가 맹목적인 믿음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을 병들게 만드는 주범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이르렀다.
“큰 댐이 국가의 ‘개발’에서 하는 역할은 핵폭탄이 국가의 무기고에서 하는 역할과 같다. 그것들은 둘 다 대량 파괴 무기이다. 그것들은 둘 다 정부가 그들의 국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이다. 둘 다 인간의 지성이 생존의 본능을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20세기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둘 다 문명이 한 고비를 넘어 그 방향을 꺾었다는 불길한 징조이다. 그것들은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이 행성 사이의 연결, 아니 둘 사이의 상호 이해가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달걀과 닭, 우유와 소, 식량과 숲, 물과 강, 공기와 생명, 그리고 지구와 인간 존재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들을 마구 헝클어놓는다.” (p.144)
- 아룬다티 로이의 인도에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이 있다면 우리들에게는 지난 정권 내내 자행된 4대강 사업이 있다. 유유히 흔들리는 강을 억지로 펴고, 잘 흐르는 강을 막아 세우는 사업은 정권 내내 이어졌다. 시행 전과 시행 중 그리고 시행 후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문제는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말처럼 ‘지구와 인간 존재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은 토건족들과 이들의 비호 세력에 의해 자꾸만 끊겨 간다. 그리고 그 사이엔 결국 돈만이 부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로 남아 있다.
“... 인도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 하나의 언어, 하나의 계급, 하나의 지역, 한 사람, 하나의 이야기, 또는 하나의 책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인도가 세상을 보는, 그리고 세상이 인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정직한 인도, 부정직한 인도, 훌륭한 인도, 여성적인 인도. 이 모든 것에 대해 논쟁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으며 칭찬하거나 경멸할 수도 있으나 금지하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끝까지 추적해서 잡을 수도 없다.” (p.194)
- 앞의 네 개의 인용문이 <공공의 더 큰 이익>에서 발췌한 것이라면, 이 문장은 <상상력의 종말>에서 뽑은 것이다. 핵폭탄 개발을 부추긴 인도의 쇼비니즘이 일본의 우경화나 한국의 수구보수화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근래 우리들 주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종북이라는 실체 없는 말이 떠오른다. 종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니고 계급도 아니고 지역도 아닌 이 하나의 말로 자신들의 모든 악취 나는 포악질을 덮어왔던 (지금도 덮어내고 있는) 지배 계급의 술수에 진저리가 난다. 자신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유일한 단어로 종북을 끌어들이는 이들 앞에서 합리적인 논쟁과 비판의 정신은 자꾸 위축되어만 간다. 하지만 이 비이성의 시대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비이성이 파괴와 금지의 상태라면 이성은 창조와 수용의 태도이므로...
아룬다티 로이 / 최인숙 역 / 생존의 비용 (The Cost of Living by Arundhati Roy) / 문학과지성사 / 203쪽 / 2003 (1998,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