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맑게 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가슴을 따뜻하게 하여 사람을 품고자 한
*2013년 11월 1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좀더 일찍 읽었어야 했다. 전지구적으로 만연해 있는 거대한 비열을, 그러니까 미국이라는 최신식 제국주의가 강요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세계화를 이토록 맑은 눈으로 꿰뚫어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한 권의 소설로 부와 명성을 동시에 거머쥔 제3세계 출신의 작가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아룬다티 로이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해냈고, 아마도 지금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
“내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작은 것들의 신》을 쓰면서 여러해 동안 누렸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시들기 시작했다. 책의 판매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몰려들었다. 내 은행계좌 잔고는 급격히 불어났다. 이미 가진 자들 사이에 세계의 부를 순환시키고 있는 거대한 파이프에 내가 우연하게도 구멍을 뚫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파이프에서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 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신》 속의 모든 감정, 모든 작은 느낌이 모조리 은화(銀貨)로 교환되어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나 자신이 은으로 된 심장을 가진 은색의 형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내 주변의 폐허화 된 풍경은 그저 나 자신의 번쩍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이바지할 뿐일 것만 같았다.” (p.8)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책으로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스타 작가로 부상한 인도의 작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명성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세계를 유랑하며 자신의 책을 팔고 그것을 통해 부를 축적하거나 획득하는 대신 자신의 나라로 돌아와 거대한 댐 건설로 인하여 자신들의 거처를 빼앗기는 인도의 최하층민들의 편에 서서 정부를 상대로 싸운다. 여덟 개의 글이 실린 이 에세이집에 실린 첫 번째 글 <홍수 앞에서> (199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네루 기념강연’ 연설을 발췌, 인도잡지 Frontline 2000년 2월호와 미국 환경잡지 The Amicus Journal 2000년 가을호에 실림) 는 바로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 강이 작가를 필요로 하듯이, 작가는 강을 필요로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계속 살아있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계속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린 정치적 투쟁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큰 소리로 정치적 성명서를 발표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마티스를 지지하고, 창턱에 금붕어가 걸쳐져 있는 그의 그림에 대해 전혀 유감이 없다. 내가 뜻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때때로 책에서 눈을 들어 우리 둘레의 세상 형편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히고, 냉방을 하고, 목욕을 즐길 수있도록, 누군가가, 먼 곳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pp.22~23)
두 번째 에세이인 <작가와 세계화 - ‘전문가’들에게 맡겨두어야 할 것인가>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평론집 Power Politics (2001) 에 실린 글) 는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 있는 이 세계를 향하여 작가인 이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역설하고 있는 글이다. 작가가 있고 이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온전해야 작가들도 있을 수 있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비상식적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상식적인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사건들 간의 연관성을 밝혀주고, 그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줄 사람들은 작가, 시인, 예술가, 가수, 영화제작자들입니다. 회사 중역회의실의 현금의 흐름을 가리키는 도표와 현란한 말들을 살아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삶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로 번역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사람이 가정과 땅, 일자리와 인간적 존엄성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p.52)
“냉소주의자들은 우리의 삶은 본래 실패한 혁명과 더러운 거래 사이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 더러운 거래의 더러움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p.53)
세 번째 글인 <왜 미국은 당장 전쟁을 중지해야 하는가> (<가디언> 지 2001년 10월 23일자에 실린 글) 는 9·11 이후 진행된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일환으로 진행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다루고 있다. 전쟁의 당사지인 미국 정부와 탈레반 정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던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그 막연했던 선택의 순간이 내포하고 있던 강압의 불순함이 선명해진다.
“민중이 전쟁의 승리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고, 정부가 전쟁의 패배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민중은 죽임을 당한다... 정부는 껍질을 벗고, 재편된다. 정부는 머리가 아홉 달린 죽지 않는 괴물이다. 그들은 국기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여, 생각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 다음 그러고는 그 국기를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의로 사용한다. 양측 모두, 미국이든 아프가니스탄이든 민중은 이제 정부가 저지르는 행동에 볼모가 되었다.” (pp.55~56)
“부시 대통령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세계의 민중은 탈레반과 미국정부 중에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인류문명의 모든 아름다움 - 미술, 음악, 문학 - 은 이데올리기적으로 양극에 있는 이 두 근본주의자들 너머에 있다. 세계의 민중이 모두 중산층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전부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될 수 없듯이,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선과 악 또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이 아니다. 어떻게 다양성을 수용하는가, 어떻게 헤게모니 - 경제, 군사, 언어, 종교, 문화 등 모든 종류의 헤게모니 -를 장악하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하는가가 문제이다.” (pp.59~60)
네 번째 글은 <9월이여, 오라> (라난 재단 주최로 2002년 9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행한 초청 강연의 내용) 이다. 신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마땅한 세계화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비판이 그 순수한 의도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작가의 의도가 순수하고 맑으니 세계화의 불온함이 더욱 도드라진다. 작가의 연설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들의 세상은 얼마만큼이나 바뀌어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반미적’이라고 (또는 ‘반인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적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기성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부시가 아니면 탈레반이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가 아니면 악마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과 한패다. 이런 식입니다.” (p.77)
“‘자유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 - 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 - 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서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정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자유로운 척하는 언론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정의를 실현하는 척하는 법원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핵무기, 상비군, 보다 엄격한 이민법, 삼엄한 해안경비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화란 오직 돈과 상품과 특허와 서비스에 관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인권존중에 관한 것도, 인종차별이나 화학 및 핵무기, 또는 온실효과와 기후변화, 또는 정의에 관한 국제적 협약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약간의 제스처라도 있으면 ‘세계화’라는 사업 전체가 망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pp.96~97)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것은 거기에 어떤 근본적인 악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극소수의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도록 허용했던 결과입니다. 21세기의 미국식 시장자본주의도 똑같은 이유로 실패할 것입니다. 두 제도 모두 인간의 지성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인간본성에 맞지 않아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99)
다섯 번째 글은 <노엄 촘스키의 외로움>이라는 제목으로 이는 노엄 촘스키의 《국가라는 이유로(For Reasons of Stae)》의 신판을 위한 서문에 사용된 글이다. 언어학자 출신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냉철한 비판으로 유명한 노엄 촘스키라면 아룬다티 로이와 아주 잘 어울린다. 미국 내에서 끊임없이 미제국주의에 대한 자기 성찰식의 글을 써내는 노엄 촘스키와 그러한 제국주의의 변방에 있는 인도에서 그 제국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노력하는 아룬다티 로이...
“... 민족주의 시대에는 ‘우리들’이나 ‘그들’과 같은 단어들은 느슨하게 사용된다. 정부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들도 시민과 국가의 경계를 고의적으로 또 성공적으로 흐려놓는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나 ‘테러를 지원하는’ 정부에 대한 ‘보복’ 전쟁의 근간에 있는 논리는 둘 다 같다. 즉 정부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시민들을 처벌하자는 것이다.” (p.107)
“미국 정부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침략을 통해서 배운 단 하나의 진정한 교훈은 어떻게 하면 미국 군대의 투입 없이, 또 미국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고 전쟁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장거리 크루즈미사일, 블랙호크, ‘벙커 파괴’ 무기들로 벌이는 전쟁을 갖게 되었다. ‘동맹국’의 군인보다 저널리스트가 더 많이 죽는 그런 전쟁 말이다.” (pp.123~124)
여섯 번째 글인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가디언> 지 2003년 4월 2일자에 실린 글) 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보다 큰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작가는 이라크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함이라는 일반적인 전쟁 이유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있다. 석유를 차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세계를 하나의 제국 아래에서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만들고자 함이라는 전쟁의 이유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이라크전쟁도 석유 때문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패권과 세계 지배, 그리고 글로벌 헤게모니를 향한 한 초강대국의 자기파괴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민중들이나 이라크 민중들이나 모두 똑같은 과정 때문에 황페화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단지 사용된 무기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한쪽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수표장이, 다른 쪽에서는 크루즈미사일이 무기로 쓰여졌을 뿐이다.” (p.139)
일곱 번째 글은 2003년 5월 13일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행한 연설문인 <인스턴트 제국 민주주의>이다. 작가는 이 연설을 통하여 미국 바깥에서 미국에 대항하는 힘보다 미국 안쪽에서 미국 정부에 저항하는 힘이 더욱 효과적이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전쟁무기에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재래식 군사력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도 미국이 우리 목을 더욱 세게 조를 여지만 줄 뿐입니다... 미국이 군사적 침략이 더 많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초래할 것이라는 논리로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반대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브레 레빗’ (온갖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인기 만화의 주인공 토끼 - 역주)을 가시나무 덤불에 내던지겠다고 위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직접 제국에 맞설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의 전략은 제국이 작동하는 부분을 고립시켜 하나하나씩 무력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혹은 전세계적으로 인종차별적인 기관을 목표로 삼아 저항했던 운동가들처럼 전후 이라크에서 재건설 계약을 포상으로 받은 모든 기업체들에게 일반 사람들의 힘으로 경제제재를 가할 수 있습니다...” (pp.174~176)
“... 미국정부보다 더 강력한 유일한 집단이 바로 미국 시민사회이니까요. 나머지 우리들은 모두 노예국가의 신민일 뿐입니다. 우리도 결코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러분은 바로 곁에서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국의 궁전과 제왕의 내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제국의 정복이 바로 여러분의 이름을 걸고 추진되므로 여러분은 이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p.177)
여덟 번째 글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 (2004년 1월 16일 인도 몸바이에서 열린 제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행한 기조연설문으로 <네이션> 2004년 2월 9일자에 실림)는 일곱 번째 글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스턴트 제국 민주주의>가 미국 내에서 미국민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면, <새로운 미국의 세기>는 미국의 바깥에서 전세계인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 신제국주의는 과거 우리가 알던 제국주의의 최신식 모델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반나절이면 전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는 무기로 무장한 한 제국이 단극적인 경제적 · 군사적 헤게모니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제국은 각기 다른 시장의 문을 쳐부수기 위해 다른 무기들을 사용합니다. 신이 돌보는 이 지구상에서 미국의 크루즈미사일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수표장이라는 두 십자망에 걸리지 않는 국가는 없습니다...” (p.180)
책이 나온 지 십여 년이 흘렀고,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회의의 시각이 그때보다 훨씬 커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뒤늦게 이를 쫓기 위하여 (특히 각종 기간 산업의 민영화에 주의하도록 하자!!!) 애쓰는 나라도 있다. 물론 그것이 (아룬다티 로이가 계속 지적하고 있는) 신제국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한민국 정부의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민중의 눈과 귀를 가리면서 이참에 (신자유주의는 실패였다, 라는 전세계적인 합의에 이르기 전에) 한몫 보려는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의 마지막 한탕일 확률이 더 높다.
뒤늦게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읽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유의미한 글임에 틀림이 없다. 소설가이든 에세이스트이든 아니면 그저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이든 그녀의 지난 행보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책은 이 지구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눈을 맑게 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가슴을 따뜻하게 하여 사람을 품어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놓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룬다티 로이 / 박혜영 역 / 9월이여, 오라 (Complete Essays) / 녹색평론사 / 221쪽 / 2004, 2011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