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와 살아 남은 이를 동시에 아우르는 추모 혹은 순례...
“언젠가 사람은 그보다 한층 어려운 인간관계에 도전해야만 하는 국면에 마주치게 된다... 바로 죽은 이와의 관계다... 살아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납득하고, 화해하는 작업은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봐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소화하고 받아들이고 화해해야 할 때, 그 마음가짐을 갖추기란 정말 어렵다.” (p.230)
후지와라 신야의 또 다른 산문집이다. 다른 산문집과 마찬가지로 에세이와 함께 사진이 들어 있다. 또한 하나의 주제를 택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산문집의 주제는 죽음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후지와라 신야의 형의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다. 사진가이자 여행가인 후지와라 신야는 자신의 형의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본연의 길, 그러니까 사진가이자 여행가로서의 길을 통하여 이를 해소하고자 한다.
“삶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사방 1미터밖에 안 되는 방 안에 앉아 고민해 봤자 대답이 나올 리가 없다... ‘움직이는’ 행위에 의해 어느샌가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고 급기야 자신조차 잊었을 때,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고민이 사실은 자기애(자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진 순간, 타인의 죽음도 가벼워지고 세계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p.232)
일본에는 시코쿠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시코쿠 전역에 있는 ‘일본 진언종 창시자인 코도 다이시가 8,9세기 수행한 여정을 따라 시코쿠 전역의 88개 절을 순례하는 길’을 의미한다. 시코쿠에 있는 ‘88개의 절에는 번호가 붙어 있으며 순서대로 돌면 1200km 정도 되는 장거리 순례길’이 되는데 후지와라 신야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코쿠의 절을 돌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형의 죽음 후에 다시 한 번 이 순례길에 올랐고, 이 책은 그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훨씬 위대한 대사나 여래를 향해 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주종 관계가 생겨난다. 그렇기에 자신을 도와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뒤집어 보면 어떨까.” (p.49)
후지와라 신야를 전문적인 문학가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닳고 닳은 프로페셔널 문학가들의 글에서 느낄 수 없는 생동감 혹은 생경함을 전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여행가인 그의 글에서는 머리가 아닌 발로 쓰는 자의 묵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면에 새겨지니 때때로 유치한 문장들이 등장하여도 그다지 섭섭하지 않다.
“비닐봉지 속에서 자명종을 꺼냈다... 태엽을 감자 고전적인 째깍째깍 소리가 났다. ‘시간’이라는 이름의 곡을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자명종을 눈부신 바다 위에 얹으며 초침의 작은 춤을 바라보았다.” (p.65)
여하튼 읽을 만 하다. 생각해보건대 지금까지는 누군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나의 시간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들이 더욱 즐비할 것이다. 나는 그 죽음 앞에서 그들과 그들의 삶을 떠올려야 할 것이고 곱씹어가며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그때 나 또한 훌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움직일 작정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나의 움직임에 죽어 사라진 그들의 움직였음이 오롯이 새겨질 수 있도록...
“사람은 먹고 먹고 먹은 끝에, 죽는다... 사람의 인생에는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 타인과의 관계 및 자기 자신과의 갈등이 반복되는 법이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한 마리 동물이다. 1일 3식을 1년 365일 동안, 살아 있는 연수만큼 먹고 먹고 먹고, 먹은 끝에 죽는다는 단순한 삶의 형태를 보이게 된다... 또한 한 때 발랄한 색과 향기를 뽐내며 우리들 눈앞에 존재했던, 우리 입속으로 들어가며 산과 바다의 맛을 온몸 가득히 느끼게 해주었던 수만 개의 식재료들은 마치 그것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 뒤에 남는 것은 희미한 기억의 조각뿐이다. 마치 인간 세상의 무상함을 나타내듯이.” (p.90)
후지와라 신야 글, 사진 / 장은선 역 /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 다반 / 233쪽 / 20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