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사회와 기형적인 인간의 공생을 모른 척 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여기 낙후하고 쇠락한 동네, 그렇지만 바로 그러한 낙후성과 쇠락의 기운을 이용하여 이 자본의 한 귀퉁이를 뜯어 먹어 보고자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곧바로 주인공으로 등극하지는 못한다. 보다 실재하는 주인공은 여기 씨발스럽게 존재하는 이들 중 한 명의 자식인 앨리시어이다. 나이 많은 아비와 그런 아비와 재혼을 한 씨발년인 엄마 그리고 어딘가 모자란 동생으로 이루어진 이 기괴한 가족의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앨리시어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것이다.
“...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p.40)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어찌보면 세상에 달통하였다고 보여지는 앨리시어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동생과 함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고미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일종의 반역을 도모한다. 그러한 반역의 대상은 바로 자신의 엄마인 그녀이다. 때때로 그녀는 이성을 잃고 앨리시와 앨리시어의 동생에게 폭력을 가한다. 그 폭력의 상태를 앨리시어는 씨발됨이라고 부르고, 그 씨발됨의 발원지는 바로 씨발년인데, 그러한 씨발년 또한 아버지의 폭력과 엄마의 무관심이라는 근원을 가지고 있다.
“... 식구들이 저녁으로 먹고 남긴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 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다. 씨발 년은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p.42)
앨리시어의 엄마인 그녀는 ‘누구 못지않게’ 맞으며 자란 이후 식당 주방 일을 하며 그 월급을 아버지에게 갖다 바치다가 어느 날 반항을 하였는데, 그 대가로 발가벗겨진 채 눈이 오는 날 쫓겨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씨발 년이 ‘발아’한 것은 그 쫓겨난 순간이 아니라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 목격한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만들고 있는,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관심하기만 하였던, 풍경이었다.
결국 피해자였던 씨발 년은 이제 가해자가 되었다. 씨발 년이 씨발 년을 낳았고, 이제 앨리시어는 또다른 씨발 년이 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소설 속의 앨리시어를 닮은 많은 앨리시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애써 이들을 모른 척 하려고 해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많은 앨리시어들이 ‘포스트 씨발 년’이 되거나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앨리시어의 냄새, 앨리시어의 복장, 앨리시어의 궤적 모두, 언제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할까.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 앨리시어도 그의 이야기도, 결국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까... 앨리시어도 그대처럼 이 거리 어딘가에서 꿈을 꾼다.” (p.160)
소설은 고스란히 대물림되어 앨리시어와 동생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재생산이 재개발을 눈앞에 둔 ‘고모리’라는 자본주의적 상징을 맞물리도록 하면서 그 주제를 확장시키고 있다. 왜곡된 사회구조와 기형화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양분을 제공하고 있음을 소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주변의 앨리시어를 우리가 모른 척 하고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앨리시어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된다) 그러한 앨리시어로부터 양분을 공급받는 자본주의는 더욱 천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가학적이면서 자학적인 단어들을 가지고도 그저 천박하지만은 않은 뉘앙스의 문장들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리라...
황정은 / 야만적인 앨리스씨 / 문학동네 / 162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