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집의 헐거운 연결고리들이 갖는 알 듯 모를 듯 한 어떤 의중..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응준은 스스로를 향하여 ‘유서 깊은 탐미주의자’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마냥 싫어할 수는 없다. 탐미주의자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미‘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만’ 탐하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어쨌든 이응준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보다 내일 단 한 걸음이라도 더 전진해 있는 것’을 자신의 문학의 목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사회’ 속의 인간을 말하고 누군가는 사회 속의 ‘인간’을 말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간’을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밤의 첼로」.
소설 속 명식이 한때 사랑하였으나 저버림을 받았던 여자인 인경이 열광하는 독일의 여류 시인 안나 헨리케의 <밤의 첼로>라는 시가 인상적이다. “……누구에게나 제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밤이 꼭 한 번은 찾아오고 그러면 그는 홀로 눈보라 치는 광야에서 뜨거운 무쇠 난로를 끌어안 듯이 신의 이름을 부른다. 신은 기쁨이 아니다. 신은 슬픔도 아니다. 그저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부르는 조용한 노래일 뿐, 가장 절망스러운 밤의 밑바닥에서 신의 얼굴을 보고자 기도하는 인간은 신이 연주하는 첼로 소리를 듣게 된다. 단 한 번은, 꼭 한 번은, 듣게 된다. 신이 흘리는 눈물보다 더 아름다운 저 첼로 소리를.” 그렇게 젊은 시절 헤어졌던 여인의 마지막 시간으로 호출되는 명식의 이야기와 명식의 친구 병운이 키우던 흰 늑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명식이 현재 작성 중인 루마니아 전위극 운동에 대한 기사가 이구동성이 아니라 동구이성의 모습으로 겹쳐진다.
「물고기 그림자」.
급작스러운 엽편 소설이 이 연작소설집에 (연작소설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 우리는 소설집을 거의 대부분 읽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는 소설을 읽는 동안 이것이 연작소설집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나 끼어져 있다. 눈이 먼 선생님인 목남을 향한 은희의 어떤 고백, 그리고 은희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물고기 그림자 하나...
「낯선 감정의 연습」.
열다섯 살에 처음 자화상을 그린 이후 오 년의 간격을 두고 자회상을 그린 나, 그러다 스물 여덟 살에서 서른한 살 가을까지 앓느라 들 수 없었던 붓을 서른 두 살에 다시 들어 자화상을 그린 나...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어두운 행위이다. 자기 이외의 어떤 것들을 그리는 일보다는 분명 그렇다. 내가 죽어도 타인은 나를 그릴 수 있지만, 죽은 나는 더 이상 나를 그릴 수 없어서일가? ...” (p.79) 그리고 이제 나는 뇌에 있는 종양 탓에 한 쪽 눈을 적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고, 어쩌면 나는 이제 나의 남은 삶을 자화상만으로 채우지는 않을 수도 있다.
「밤에 거미를 죽이지 마라」.
한나와 은석은 한때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결혼을 며칠 앞둔 은석이 홀연 한 여자와 함께 이 나라를 떠나버렸다. 한나는 버림받았고 복수를 꿈꿨다. 그런 한나 앞에 은석이 홀연 나타난다. 그리고 한나는 그에게 뱉은 거짓 제보를 빌미로 한 섬에서 한 방에 함께 머물게 된다. 한나는 은석을 죽일 수 있고 은석은 그 죽음을 받아들일 작정을 하지만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이러한 살인하는 이와 살해당하는 이라는 기약은 멈춘다. 그리고 한나는 살인한 자라는 누명의 굴레에 은석은 실제로 살인한 자라는 사실의 굴레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서를 쓰는 즐거움」.
서른 살 터울의 형 명한이 죽음과 함께 남긴 히말라야금강앵무새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수한, 그리고 명한의 어린 딸인 보영과 오래전 사라져버린 보영의 엄마이자 명한의 처인 인도 여자 트리샤까지... 히말라야에서 서식하는 금강앵무새와 관련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히말라야금강앵무새와 함께 적별의 작은 동굴에 버려둔다. 그리고 며칠 뒤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주검 곁에 히말라야금강앵무새가 있으면 그의 영혼이 극락왕생한 것이라 생각하고, 새가 없으면 다시 태어나 이승을 헤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일사천리로 여러 이야기들이 마무리되고,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도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부드럽게 와 닿지는 않는다.
「버드나무군락지」.
이단인 한 종교의 마지막 즈음, 유일한 신도로 남아 있던 중각과 재만은 결국 그 원장을 죽이고 원장의 미친 딸 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후 길을 나선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와 함께 몽골에 머물고 있는 시인 권진규와 임신한 상태인 그의 몽골인 아내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오래전 이승우의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 비슷한 것이 떠오르는데, 그러다보니 조금 구식인 소설이 아닌가 넘겨 짚게도 만든다. 여하튼 이 소설을 통해 비로소 이 소설집이 연작 소설집이었던 것이로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앞의 소설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소설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굳이 듬성듬성한 연작의 형태로 소설집을 구성한 작가의 의중을 알 듯 모를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로 기획된 (애초에 그런 의도로 각각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소설을 일단 쓰기 시작한 이후에 그런 의도가 개입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소설들이 갖는 연결고리들이 헐거워 보인다. 탐미주의자를 자임했으나 과거의 이응준이 보여준 퇴폐적일 정도인 탐미의 의지보다는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 갈구의 의지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뭔가 그간 작가로 살아가며 쌓인 더께를 이렇게 한 꺼풀 벗겨내 보려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응준 / 밤의 첼로 / 민음사 / 274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