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탈 없이 사는 나를 느닷없이 환기시키는 이미 지나버린 이런 사건들...
별탈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들 일상의 여기저기에는 언제나 움푹 파인 상처나 갈등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 중 하나를 건너 뛰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옆에 또다른 자신만의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누군가를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때로 그 웅덩이는 내 옆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나의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모른 체 하였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
「구멍」 .
작가는 작품집의 여러 작품에서 과거의 어떠한 사건이나 어떠한 시점으로 돌아가고는 한다. 그 회상은 절묘한 묘사에 의한 현장성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강조되는 대신, 현재의 내가 갖는 태도나 뉘앙스와 절묘하게 결합하는 이야기의 힘으로 도드라진다. 어린 시절 친구인 탈이 구멍에 빠져 숨지는 사건과 관련하여 바로 그 사건의 순간 바로 옆에 있던 내가 꾸는 현재의 꿈 그리고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기억은 진실 혹은 사실이라는 함의 안에서 새롭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코요테」.
과거의 기억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기억이라는 것은 현재의 나에 의해 계속해서 변용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으로 그 재능을 확인하였으나 이후 진전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와 그러한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시간을 나름의 방식을 견뎌냈던 어머니,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장성한 이후의 아들의 기억으로 재조합된다.
「아술」.
아이가 생기지 않는 부부는 교환 학생인 아술을 집에 묶고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아술을 통하여 자식을 기르는 것을 유사 체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아술은 라몬이라는 학생과 동성애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아술과 라몬이 갈라선 이후 아술의 기분을 풀어줄겸 집에서 벌어진 파티, 그러나 그 파티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이 부부는 자신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자신의 나이만큼 더 나이가 많은 교수인 로버트와 나의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내가 만나고 이후 결혼을 하게 되는 콜린과의 관계는 그저 흔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몇차례의 돌발적인 스킨쉽을 제외한다면 별다른 육체적 관계도 없이 그저 서로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교류한 두 사람의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만남’이라고 불리운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 묘하게도 긴 여운을 남긴다.
「강가의 개」.
나의 형과 그 친구인 더그, 그리고 두 사람에 의하여 범해진 캐리 선배의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심경이 여러 각도로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이처럼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그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을 삼는다. 라쇼몽 류와 다른 것은 그러한 시선의 다양성이 그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에 의해서 담보된다는 것... 여러 사람의 다양한 시점 대신 등장하는 인물이 통과한 시간이 이야기의 변화를 만든다.
「외출」.
학교에서 인기가 있는 학생이 아닌 나는 친구인 테너와 함께 아미시 공동체의 여자 아이들과 만나고는 한다. 공동체 바깥의 남자 아이를 만난다는 것으로 일탈을 경험하는 레이철과 그러한 레이철을 통해 이성과의 경험을 쌓는 나는 어쩌면 둘 다 조금은 어렵게 성장하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머킨」.
머킨은 동성애자 여자가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의 레즈비언 성향을 숨기기 위하여 파트너로 삼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설에는 양성애자인 린의 아버지와의 만남에 동석하고는 하는 머킨인 내가 등장한다. 그리고 린과 동거하는 실제 파트너인 델핀은 나와 린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한다. 이와 함께 센터에서 내가 가르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이 아이들이 그러한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발설하려고 기울이려는 노력이 은근히 성정체성을 숨기고 있는 린 등과 대비되는 듯도 하다.
「폭풍」.
결혼할 사람과 유럽에 여행을 갔다가 그 남자를 버려두고 돌아온 누나, 그리고 지금 사귀는 남자의 말에 따라 투자를 했다가 꽤 많은 날리게 된 어머니, 그리고 나... 현실적인 듯하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한 이 둘의 이성관이라는 것을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크게 개입하지 않는 내가 더 흥비롭다.
「피부」.
세 페이지짜리 엽편 소설이 하나 끼어 있다. (소설집의 첫번째 소설인 <구멍>도 엽편에 가깝다) 가장 행복한 순간 그리 행복하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나의 심경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코네티컷」.
아버지가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섬으로 들어가 있던 그 시기, 내가 발견한 옆집의 벤틀리 부인과 나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이제 15년이 지난 다음 그것을 떠올린다. 작가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소설을 통하여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올린다.
앤드루 포터 / 김이선 역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 21세기북스 / 290쪽 / 2011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