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은 무거워지고 서술은 탁해지고 있는 것 같은...
내가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신선한 설정의 재기발랄한 서술과 같은 것이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나... 설정은 조금 무겁고 그 진행은 꽤나 탁하다. 작가의 글을 읽는 내 눈의 길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자꾸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제 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현실에 뼈대를 두고 있기는 하나, 어딘지 일층보다 이층이 더욱 크게 지어진 집에 다다른 느낌이다.
「바소 콘티누오」.
“마주보기는 분명 아니지만 외면도 아니다. 마주보기보다 더한 마주보기라는 걸, 알려 하지 않을 뿐이다. 완강히 마주보기를 꺼리는, 두 사람에게 작용하는 동일한 종류의 의지가 실은 모종의 연대거나 유대라는 걸. 그리움, 혹은 면구(面灸)의 유대.” (pp.25~26) 봉한씨와 그의 아버지 김옹이 함께 하는 일상에 배어 있는 거리... 그리고 그 사이를 조용조용 채워가는 음악들... 계속되는 저음을 뜻하는 소설의 제목이 적당해 보인다. 늙은 아비와 결혼하지 않은 늙은 아들 사이의 간극도 그만큼 세월을 먹게 되니, 그저 초조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별명의 달인」.
“... 별명은 억압된 음해욕구를 일깨우고 자극하는 면이 있어야 잊히지 않고 별명답게 애용되는 거였다...” (p.41) 그렇지, 별명이란 그런 거지... 친구들의 별명을 짓는데 특출난 재주를 지니고 있던 라즈니시라는 친구... 그렇게 친구들의 별명을 지어주던 라즈니시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그 친구 라즈니시를 만나 내가 확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란꽃」.
“잃어버린 일기장과 잡기장까지 더하면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썼던 글들은 대체 얼마나 될까... 소용없고 쓸데없는 것들의 무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뱉은 푸념과 허텅지거리, 시샘과 원망의 썩은 물웅덩이였다... 사실도 진실도 진심도 아닌 글더미. 내 것도 아닌 것들. 소용없고 쓸모없는 짓의 무심한 반복을, 수십 년이나 지속해오다니. 무엇 때문일까.” (p.103) 칠남매의 딱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나 (유독 이 소설집에는 동기간에 연락을 주고 받으며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만들어내는 소설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고향집에 있던 펄 벅의 책 모란꽃과 그 집의 뒤꼍에 있던 토주... 끊임없이 글을 쓰는 내가 기억하여 끄집어내는 많은 것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허상에 관하여...
「6431 - 워딩.hwp」.
<별명의 달인>과 이 소설이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형이 하는 말의 뜻은 자주 사전과 달랐다. 따지고 보면, 같고 다르고는 영혼과 유령만큼의 차이일 뿐이다. 생각이 되는 말, 현실을 움직이는 말은 언제나 새롭게 쓰이기만 할 뿐 사전 속에 머물 리 없다. 그런, 말밖에 없다. 아무려나 삶의 중압과 죽음의 공포마저 개의치 않고 건너게 할 것은.” (p.142) 어린 시절 다쳐서 몸이 불편하고 말을 하지 못하였더 내게 글을 가르쳤던 돌아가신 외삼촌의 아들인 형... 그런 형이 일년 전 실종되고, 이제 제사를 치르겠다는 형수에게로 가는 길... 문자로 동기간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형에 대한 생각들...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
정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정화백의 생가 복원사업, 그리고 그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생가터에 자리잡게 되는 산딸나무에 얽힌 이야기... 정씨 집성촌인 그곳이지만 그들에게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조금씩 겉돌아야 했던 나와 당신이 결국은 그 복원사업의 핵심이 되어버리는데...
「화양연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봉한(바흐 아저씨라고 불리운다, 그러고보니 봉한은 소설집의 첫 번째 소설인 <바소 콘티누오>에 등장하는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과 송주의 연애담이라고나 할까... 숫기가 없던 여자 그리고 그보다 더 숫기가 없던 남자는 삼십대 중반을 넘긴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서로를 온전히 복원시키지 못한 채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있을 뿐이다.
「저 좀 봐줘요」.
작가는 유령이나 귀신이나 영혼이라는 단어 대신 온비, 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었다. 바닷가 마을 그 여자의 어깨를 세게 두드리고는 하는 온비인 나의 이야기이다. 바깥 출입을 최소한으로 하며 밥집과 근처 카페 출입으로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여자와 나 사이의 관계가 소설의 중요한 연결 고리인데, 너무 촘촘하지 못하게 배열되고 있는 느낌이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
십대때 집을 나간 이후 전국을 떠돌았고 지금은 사이판에 있는 누이, 그리고 고향집 거울에 붙어 있던 새... 거울에 붙박이된 새와 달리 전생애를 유랑인처럼 살았던 누이의 이야기에 솔깃하였지만... 재주가 많았던 집 떠난 누이와 그 누이와는 달리 붙박이처럼 살아야 했던 또다른 누이, 그리고 나 사이의 유대가 확 와닿지는 않는다.
구효서 / 별명의 달인 / 문학동네 / 293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