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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7. 2024

김유태 《나쁜 책: 금서기행》

이토록 가까운 (우리의) 검열과 금서의 나쁜 역사...

  《강좌철학》을 읽을 때였던가. 선배는 자신의 책을 보여주며 너희의 책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며 찾아보라 하였다. 다른그림찾기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가, 라고 투덜대려는 찰나 선배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짚었다. 내 책에는 마르크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선배의 책에는 칼이라고 되어 있고, 레닌은 블라디미르, 엥겔스는 프리드리히로 명기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 가리고 아웅 같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위험한 책에는 금서라는 딱지가 붙고 금서 중에서도 정말 위대한 책은 독자의 내면에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온다. 독서의 끝자락에서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책만이 불멸의 미래를 약속받는다... 금서로 지정되어 손가락질당했거나 논란 끝에 사멸될 위험까지 겪었던 벼랑 끝 책들은 오히려 그러한 역사성 때문에 더 큰 가치를 획득한다. 이때 우리가 마주하는 진실 역시 무섭도록 단순하다. 안전하지 못했던 책들이야말로 재생再生의 가능성을 확보하며그것은 인간이 책을 사랑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에서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됐든 종교 지도자가 됐든 누군가가 독서를 금지한 책은 혼돈의 세월이 지나면 지하의 골방에서 지상의 광장으로 걸어 나와 우리 손에 쥐어졌다...” (p.12)

  당시 내가 속한 문학회는 사이공思以空(헷갈린다, 틀렸다면 선배 중 누군가가 지적해 주겠지...)이라는 제목의 문집을 발간했다. 어느 날 불신검문 중 가방 안의 이 문집이 말썽이 된 일이 있었다. 전경은 한자로 된 문집 제목을 말하라 하였고, 선배는 사이공이라고 답했는데, (하필이면 4·19를 앞둔 시기였는데) 4월 20일에 있을 어떤 집회와 연관된 문건이라 오해를 받아 닭장차에 실렸다, 는 농담같은 이야기가 실제하던 시절이었다.

  “두 아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녘, 그녀는 작은 책상에 앉아서 흑인으로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야기였고, 동시에 주변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토니 모리슨의 문학은 ‘최정상 문학의 나침반은 언제나 바로 자기 옆의 소외당한 사람들의 자리를 향한다’는 명징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위대한 문학은 이처럼 아주 작은 개인사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획득할 때 완성됩니다.” (p.104)

  80년대 학번인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각 대학교 앞에 사회과학서점이라 불리는 서점들이 한두 개씩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운동권 학생들은 그곳에서 책을 구매했고, 그 책으로 사회과학학습을 하였다. 때때로 그 서점들은 공안 당국의 표적이 되었고, 털렸다(라는 것은 형사들이 들이닥쳐 사회과학서적들을 가져가고 동시에 이를 판매한 이들까지 잡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셀라의 문학적 위상은 독특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두 가지 아이러니를 형성합니다. 셀라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시민들의 무의식을 건드려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프랑코의 군부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폭력의 원인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작가 스스로가 폭력의 가담자였다는 얘기지요. 또 그는 금서의 작가였지만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검열관으로 일한 이후에도 그의 다음 소설 『벌집』은 또 금서가 됩니다.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의 작품이 금서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인생이든 문학이든 참으로 복잡한 요물입니다...” (p.137)

  그 서점에서 <노동해방문학>이란 <실천문학>과 같은 계간지를 구매하였는데, (주로 초창기의) 몇몇 권에서는 페이지의 일부가 혹은 통째로 날아간 흔적이 남아 있다. 금서와는 별도로 도서에 대한 검열이 엄연히 존재하였던 시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간지들보다 훨씬 수위가 약하였던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의 폐간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던 것이 5공화국이었다.

  “... 나지브 마흐푸즈가 일러주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야훼와 엘로힘, 기독교의 하느님과 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등 아브라함 계통에서 지칭하는 모든 신의 이름이, 실은 처음에는 서로 같았던, 단 하나의 공통된 유일신을 가리킨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처럼 본래 하나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다른 길을 걷는 인류가 다시 하나가 될 가능성, 그런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걸작입니다.” (p.310)

  저자인 김유태는 《나쁜 책: 금서기행》에서 ‘동서양 분서의 긴 역사, 니치의 책 화형식, 공산주의 독재 정권의 검열’과 같은 예를 들며 책을 향한 ‘나쁜’이라는 낙인의 역사를 거론하고 있지만 실은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우리가 겪은 독재 정권이 자행한 검열의 나쁜 역사가 이토록 가깝다. 그건 그렇고 책에서 거론된 ‘나쁜 책’ 중 하나인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최대한 빨리 읽어보고 싶다.

김유태 / 나쁜 책: 금서기행 / 글항아리 / 401쪽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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