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에서 더욱 강력해지는 지구인으로서의 삶의 의지...
광활한 우주를 압도적으로 휘황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우주가 아닌 지구를 향하고 있다. 꽉 차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텅 비어 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우주가 아니라 그 안에 한 점과도 같은 지구를 향하고 있으며, 그 지구인이 우주 안에서 하나의 점이 되어 가는 광경을 간간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중력이 없는 그곳에서 어떠한 이끌림도 없이 유영한다는 낭만 따위는 없다. 그런데 그 중력이 없는 무한한 공간 안에서 느끼게 되는 속도감의 아이러니라니...
영화는 그 시작부터 우리를 지구 상공 600km 우주 안에 덩그러니 내려 놓는다. 저 멀리 지구가 보이는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맷(조지 클루니 분)의 끊임없이 어이지는 수다(의 속도감도 만만치 않다)이다. 우주 유영의 기록이나 자신의 멋진 모습에 대해 떠들어대는 맷과 달리 라이언(산드라 블록 분)은 긴장하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곧이어 위성의 폭발과 그에 따르는 연쇄작용으로 이들의 우주선과 같은 궤도로 파편이 쏟아지면서 영화는 자칫 따분해 보일 수도 있는 이들의 우주에 속도감을 부여한다.
함께 작업하던 우주인이 죽고, 라이언은 저 멀리 튕겨나가고, 그들이 타고 왔던 우주선은 만신창이가 된다. 모르던 동네에서 길을 잃어도 아찔할 것인데 라이언은 우주에서 길을 잃는다. 통신마저 끊기고 시야에서 우주선도 사라진 그곳에서 카메라는 라이온의 시선을 따라 끝없는 우주를, 그리고 간간히 비치는 지구와 태양을 훑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메라는 라이언의 헬멧의 바깥에서 은근슬쩍 헬멧 안으로 들어가 관객들에게 라이온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시선이라는 일치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생각한 것과 달리 영화는 무척 대중적이다. 우주가 주는 공허감을 철학적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어림짐작과는 달랐다. 대신 영화는 우주에서도 끊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곳에서 더욱 절실해지고 마는 지구인으로서의 삶이라는 범지구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삶에의 의지가 불분명한 라이온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가 우주의 미아가 되었다가 다시금 펄떡대는 삶에의 의지를 갖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우주에서의 사고를 통해 (3D로 보는 영화는 마치 스페이스 크래시 체험관 같다) 새롭게 태어난다. 우주 정거장의 소유즈 우주선에 탑승하면서 옷을 벗고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장면에서 그리고 지구에 불시착한 이후 아이의 첫 번째 걸음마처럼 아슬아슬하게 발걸음을 떼는 장면에서 그러니까 무중력의 상태에서 한 번 그리고 이제 중력의 상태에서 또 한 번 라이온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지구가 중력을 가진다거나 우주에 중력이 없는 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 뿐이다) 라이온의 딸이 죽은 것이나 맷이 우주 속으로 사라진 것에 어떤 커다란 섭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라이온이 살아 남은 것에 어떤 크나큰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개가 짖는 일상으로부터 그리고 아이가 우는 일상으로부터 라이온이 그리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겨날 뿐이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를 광대한 우주의 한 가운데로 데리고 가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까닭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비티 (Gravity) / 알폰소 쿠아론 감독 / 산드라 블록, 조지 클루니 출연 / 90분 / 2013 (2013)
ps.산드라 블록과 무선으로 소통하는 지구의 소리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아들인 조나스 쿠아론이 감독한 단편영화 <아니가크>에 나오는 대사라고 한다. 이 단편 영화는 그린란드 이누이트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따라서 영화에 나온 잡음 섞인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는 바로 이누이트 사람들의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