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향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 받는 순정 혹은 서정...
후배를 통해 알게 된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로부터 촉발된 감독에 대한 애정은 <초속 5센티미터>를 거치며 극대화되었다. 혹시 그러한 사랑의 감정이 흐트러질까 두려워 <별을 쫓는 아이 : 아가르타의 전설>은 부러 보지 않았을 정도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신카이 마코토의 소녀적 감수성에 젖어 잠시 더운 여름을 잊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삼청동 정독 도서관, 청춘의 시절 홀연히 떠다녔던 그 한 켠에 자리잡은 영화관의 46분은 그렇게 어린 청춘의 심정으로 흘렀다.
장마철에 보면 딱 좋을 애니메이션은 열 여섯 고등학생인 다카오와 스물 여덟 유키노 사이에 벌어진 어느 여름의 짧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로 가는 지하철로 갈아타지 않고 공원에서 오전을 보내는 다카오는 어느 비오는 날 공연의 정자에서 초콜릿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연상의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다카오의 가슴에서 학교 마크를 발견한 여인은 단가의 한 구절을 남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곧이어 시작된 장마와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구두 디자이너를 꿈 꾸는 다카오는 아르바이트로 바쁜 와중에도 그녀의 발에 맞는 신발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고,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가득해 보이는 여인은 그러한 다카오의 관심을 위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게 한 여름밤의 꿈과도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은 잔뜩 물에 젖은 배경 화면과 가시와 다이스케의 피아노 소리의 설레임 속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개학을 하고 학교에 돌아온 다카오가 유키노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진전된다. 이미 장마는 그쳤고 두 사람의 운명 같았던 만남은 햇살 속에서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다카오는 어렵게 자신의 마음을 발설하지만 유키노는 이를 외면한다. 다카오는 눈길을 주지 않고 돌아서고, 유키노는 뒤늦게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아파트의 계단에서 마주하게 된 두 사람...
뭐, 짧은 런닝 타임동안 소소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이니 (딱히 스포일러 운운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할 것이 많지 않다. 그저 이 감독은 참, 별 무리 없이 우리들 내부의 서정을 건져올리는구나 싶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사라졌던 순정을 느끼게 만드는 감독의 힘의 근원이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어떤 평론가이던가 여고생의 감수성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도대체 유지하고 싶다고 유지할만한 것이던가 말이다.
유키노의 발을 본떠 선을 그리는 다카오의 손이나 빗발 속에서 그만큼 빠른 속도로 다카오를 향하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유키노의 맨발을 볼 때 두건거리는 마음이라니 참... 영화관을 나와 삼청동에서 인사동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사진기를 둘러매고 이 거리를 방황하던 때로 회항하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인생의 어느 순간, 설령 그 혹은 그녀에게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혹은 그녀를 향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온전히 위안을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의 정원 (言の葉の庭) / 신카이 마코토 감독 / 이리노 미유, 하나자와 카나 목소리 출연 / 46분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