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느 야곱을 따라 아직 짓무름 가시지 않은 구십년대식 유미주의 속으로.
영화를 보는 동안 끊이지 않고 들리던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Zbigniew Preisner의 Enfer 를 다시 듣고 싶었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Enfer 로 명명되고 있다. 지옥... 유투브의 음악에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벡신스키의 그림이다. 아름다운, 지옥 같은 그리고 벡신스키... 내친 김에 다시 영화를 찾는다. 영화를 보았던 구십 년대의 어느 즈음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건만 아직 짓무른 눈의 습기는 가시지 않고 있다.
밤 하늘, 1968년 폴란드의 어린 아이... 밤 하늘의 별이 무한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지상의인간은 유한함의 상징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할까... 이제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세상에 자신이 혼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베로니카의 생각은 시위 현장을 카메라로 담던 관광객과의 마주침을 통하여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버스에 올라타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베로니카를 바라보는 베로니카... (지금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테두리로 봉합되었지만, 실존주의자이기도 하였던 감독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갈라져 있지만 이제 막 그 분별의 의미가 사라져 가는 당시의 시대상을 프랑스와 폴란드로 나뉘어져 있으되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는 두 명의 베로니카로 그려냈다.)
시골 합창단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보여주던 베로니카는 친구를 따라 오디션장에 갔다가 합창단장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정식 오디션을 거쳐 합창단과 함께 정식 무대에 서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사랑하는 아빠가 있고 이제 막 그녀의 천재적인 자질을 알아 본 합창단의 첫 무대가 있던 저녁... 그녀는 통증을 느끼던 가슴을 움켜 쥔 채 모로 쓰러진다. 죽음...
그 무렵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남자 친구와의 섹스를 마친 후 누워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울고 있는 거냐는 물음에 왠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대답한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에게 들이닥친 죽음을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 두 베로니카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 쪽의 사랑은 다른 한 쪽의 사랑으로, 어느 한 쪽의 아픔은 다른 한 쪽의 아픔으로...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바이올린 교습을 그만둔다. 그리고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마지막 순간 불렀던 노래 enfer 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 사이 인형극을 보러 갔다가 거울에 비친 꼭두각시 인형사의 모습을 보게 된 베로니카는 그와의 어쩔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인형사인 아라렉상드르가 보낸 테이프에 실려 있던 소리들을 따라가 결국 그와의 사랑을 완성시킨다.
내가 인지하고 있지 못한,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또 다른 나와 지금 여기의 나, 의 사이를 이제는 타계한 (1996년 사망), 내 마음 속에서는 유미주의와 탐미주의의 감독이었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온전히 메우고 있다. 꾸부정한 노인을 비롯해 아랫 눈썹을 반지로 문지르는 습관, 튀기는 공과 같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여러 사소한 흔적들로 관객들은 환기된다. 그 환기가 쌓이고 쌓여서 가슴 한 켠이 상기된다.
특히 붉은 색감과 푸른 색감을 넘나들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화면들 속에서 이렌느 야곱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죽음마저 끌어 안을 것 같은 습습한 활기로 넘친다. 더불어 사진 속에서 폴란드의 베로니카를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던 베로니카와 그 베로니카의 눈물마저 입술로 덮는 인형사 사이의 섹스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먼 곳의 베로니카를 떠올리며 흐느끼는 베로니카, 그 흐느낌이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신음으로 바뀌어 가는 순간이라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eronique) /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이렌느 야곱, 필립 볼터, 샌드린 듀마스 출연 / 110분 / 2004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