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노멀한 문장으로 그려내어 더욱 미스터리한 사람과 사이의 관계...
*2013년 10월 1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근래 알게 된 두 명의 작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유디트 헤르만이다 (다른 하나는 앨리스 먼로이고). 작가의 단편 <소냐>를 읽고 그 묘한 매력에 이끌렸다. 작가는 휘황한 미사여구의 묘사나 특출난 사건으로 독자를 유혹하지 않는다. 우리들 일상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소소한 문장으로 그저 써내려갈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느 새 그 단순한 문장들에 매료되어 읽기를 멈추지 못하고, 그 문장들과 일상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취하여 갸우뚱한 채로 허공을 응시하게 된다.
「붉은 산호」.
“... 그들은 증조할머니를 쳐다보았고, 증조할머니는 저녁 빛과 함께 슬프고 아름답고 낯선 어떤 것으로 스며들어 갔다. 바로 그 슬픔, 아름다움과 낯섦이 러시아 영혼의 특성인지라 예술가들과 학자들은 증조할머니를 사랑했고, 증조할머니는 사랑하도록 내버려두었다.” (p.14) 증조할머니로부터 내게로 어진 붉은 산호 팔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 때문에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목숨을 잃었고, 이제 나는 그것과 함께 애인을 잃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을 받고자 한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오래 전의 한 여인,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랑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파도치듯 현재를 유영하고 있는 듯한 나의 이야기가 묘하게 중첩된다.
「허리케인」.
허리케인이 올 것이라는 위험 속의 한 섬에 머물렀던 크리스티네와 그의 친구 노라, 그리고 섬에 살고 있는 노라의 남자 친구(라고 여겨지는) 브렌튼과 섬의 남자인 캣이 등장한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허리케인 소식으로 고조되는 불안감과 유부녀인 캣의 유혹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크리스티네의 커져가는 흔들림이 소설 전체를 잡고 흔들고 있는 듯하다.
「소냐」.
“... 나는 소냐를 두려워했다고 생각한다. 작고 특이한, 말이 없고, 나와 잠자리도 하지 않던, 나를 큰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만 보던,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내가 결국 사랑했을지 모를 아이와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삶의 가능성이 불안해졌다... 나는 소냐 없이 혼자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뜻밖에도 그녀가 내게 중요하다고 여겨졌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고, 한편으로는 영원히 멀리 사라졌으면 했다.” (p.88) 익숙하지 않은 소설 속 인물을 만난 것이 오랜만이다. 소설 속의 소냐를 현실 속의 누구와도 병치 시킬 수 없어서 좋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결국 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었으면서도 소설 속의 나는 소냐와의 관계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읽다보면 그러한 나의 행동에 수긍이 간다고나 할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끝」.
자신들과는 떨어진 건물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그러한 할머니의 마지막을 별다른 감정 없이 서술하고 있는 듯 한 소피... 소피의 입을 통해 구술되는 자식들에 대한 할머니의 어떤 감정이 들릴락말락 한다고나 할까.
「발리 여인」.
“그 여자는 네 마음에 들었을 거야. 그 작은 여자. 그녀는 네가 늘 좋아하던, 가까이하기 어려운 타입이었고, 저만큼 멀리 떨어져서 존재하는 사람 같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관찰하고 그녀에 대해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지. 그녀는 상처받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고 아름다웠고 발이 아주 작았어. 여인은 로비에서, 대리석 바닥에서,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아주 비현실적으로 보였어...” (pp.115~116) 크리스티아네가 꼬시고자 하였던 연출가의 아내인 발리 출신의 여인에 대한 묘사가 좋다. 집에 있는 크리스티아네의 애인을 향하여 말하는 형식도 나쁘지 않다.
「헌터 톰슨 음악」.
죽어가는 사람들이 묵는 워싱턴 제퍼슨 호텔에 묵고 있는 노인인 헌터와 그 호텔에서 잠시 머문 소녀 사이의 이야기가 건조하고 서럽지만 아름답다.
「여름 별장, 그 후」.
표제작이다. “... 슈타인은 자주 ‘네가 온다면…….’ 이라고 썼다. 그는 ‘와.’ 라고 쓰지는 않았다. 나는 ‘와.’ 라는 말을 기다리기로 하고 그러면 그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물론 소설 속에서 슈타인은 와, 라고 쓰지 않았다. 집을 가지고자 하였던 택시 기사 슈타인, 그리고 그러한 슈타인과 잠시 사귀었던 나의 이야기이다. 결국 슈타인은 자신이 마음 먹었던 집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카메라 옵스큐라」.
“... 예술가는 숨을 내쉬며 마리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그의 손은 그녀의 목덜미로, 등 아래로, 옷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마리는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조감도처럼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 흐르는, 두 사람의 낯선 엉김을 모니터로 보고 있는 그녀는, 그것이 생소하다. 방 안은 따뜻하다. 책상 위에는 작은 종이들이 붙어 있고, 예술가가 남쪽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팔에 안겨 찍은, 금발에 볼이 터질 것 같은 어릴 적 사진.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것은 언제나 처음이고 또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 마리는 안타깝다.” (p.187) 위의 마지막 문장이 자꾸 눈에 밟힌다.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것은 언제나 처음이고 또 한 번뿐이라는 사실’에 마리가 아니라 나 또한 안타깝다. 예술가가 마리에게 품는 감정과 마리가 예술가에게 품는 감정 사이의 간극이 읽혀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데르 강의 이쪽」.
코베를링의 친구의 딸인 안나, 그녀와 코베를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생은 극적인 게 아니야.’ 라고 소리지르고 싶어하는 코베를링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은 묘하다. 그녀의 소설의 어떤 지점이 나를 잡아 끄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더욱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심한 듯 써내려 가는데 소설을 읽고 나면 자꾸 한숨이 나오는데 ‘거 원 참’ 이라고 할밖에... 매우 노멀한 문장으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이 종국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아주 미스터리한 무엇으로 만들고 있다.
유디트 헤르만 / 여름 별장, 그 후 (Sommerhaus, später) / 민음사 / 222쪽 / 2004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