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삶을 통하여서도 점점 무르익어만 가는 죽음이란 것...
“... 장수한 부모의 아들이고,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공을 들고 뛰던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건강해 보이는 여섯 살 위의 형을 둔 동생이었지만, 그는 아직 육십대에 불과한데도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몸은 늘 위협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애인들과 자식들과 성공을 안겨준 흥미로운 일자리를 가졌지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 (p.76)
설령 그것이 설익은 것이었다고 느껴지더라도 죽음을 앞둔 모든 삶은 무르익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 이제 막 무덤에 묻힌 한 남자가 있다. 첫 번째 결혼을 통하여 얻은 두 아들 랜디와 로니와 척을 지고 살았던, 두 번째 결혼해서 낳은 딸 낸시와 마지막까지 정서적 교류를 하였던, 하지만 세 번째 결혼을 한 덴마크 출신 모델 메레테와의 열애를 들켜 두 번째 아내인 피비와 이혼을 해야 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마지막은 은퇴자 마을인 스타피시비치에서의 작은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그들의 빠른 움직임을 눈길로 따라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까다로운 즐거움이었다. 사실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포옹은 혹독한 슬픔을 자아내, 견딜 수 없는 외로움만 더 사무치게 할 뿐이었다...” (p.106)
간혹 조깅을 하면서 젊은 육체들을 향해 눈을 돌리기도 하지만 남은 것은 혹독한 육체 뿐인 남자는 은퇴자 마을에서 그림을 가르치며 아주 뻔하고 사소하게 남은 생을 보낸 남자는 그렇게 소설 속에서 아직 살아 있다. 자신의 삶을 끌어들인 부모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른 형 하위에 대한 상념, 그리고 연거푸 성공하거나 실패한 사랑 혹은 결혼과 남겨진 자식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죽음을 앞둔 그리고 이미 죽은 남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던 바다라 한들, 오직 그 바다만 보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pp.130~131)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죽음을 초조해하게 될까, 그것은 우리 육체의 쇠락과 관련이 깊다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정신의 피폐와 관련이 더 깊다고 보아야 할까. 삶은 유의미한 것일까 아니면 무의미한 것일까, 그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의 경계는 어느 곳에서 주욱 그어지게 될까. 이 죽음 속에서 사색하는 남자를 살아 있는 우리가 읽어나갈 때 우리는 덩달아 깊고 어둡고 혼돈으로 가득한 삶을 떠올리고 그 안에 잠길 수밖에 없다.
“... 그는 늘 안정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정체였다. 이제 모든 형태의 위로는 사라졌고, 위안이라는 항목 밑에는 황폐만이 있었으며,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p.135)
우리들의 삶 안에서 죽음은 얼마나 희박한가 혹은 얼마나 짙은가, 우리들의 죽음 안에서 삶은 얼마나 생동하는가 혹은 얼마나 희미한가. 삶이 흐르고 흘러서 도달하는 곳이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초조해지는가, 그 초조감이 사라지는 것은 정녕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여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우매한 삶의 여파로 죽음 앞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가.
“...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여.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p.175)
소설은 그렇게 독특한 설정 그러니까 이미 죽어버린 자의, 삶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윤리적인 부분과 비윤리적인 부분을 그러한 구분조차 의미 없어진 죽음 이후에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 독자인 우리는 주인공인 ‘그’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할 수도 부러워하거나 욕할 수도 없다. 어쨌든 그는 죽었고 이미 땅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기준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p.188)
그렇게 소설은 마지막 문장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삶과 죽음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으로, 있었던 삶과 없는 죽음으로, 현재와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곧 과거가 되거나 과거가 곧 현재가 되는,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어떤 지점에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훈계가 아닌 사색으로서의 죽음을 윤리가 아닌 실존으로서의 삶을 내내 직설적으로 그린 소설은 마지막 순간에도 꽤나 담백하다.
필립 로스 / 정영목 역 / 에브리맨 (Everyman) / 문학동네 / 191쪽 / 2009 (2006)